존은 뉴욕이 좋았다. 거리가 좋았고 이웃이 좋았다. 어쩌면, 그의 양어머니를 보지 않을 수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그는, 알콜중독에 성격도 거지 같았던 그녀가 너무 싫었다.
종전 소식으로 시민이 거리로 모두 뛰쳐나와서 타임스퀘어에서 웃고 춤추던 날이 벌써 5년 전이었다. 1950년대를 시작하는 미국은, 그리고 뉴욕은 활기에 넘쳤다. 봄이지만 아직 한기가 남아 있어서 모두들 모자와 두터운 코드를 걸치고 있었지만 이스트 71번가를 지나다니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집을 나온 존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디슨 애비뉴와 57번가 교차지점까지 가려면 여러 블록을 지나야 했다. 그는 길가의 상점들을 하나씩 훑어가면서 천천히 걸어갔다.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얼마 전에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상태였다. 이미 결혼까지 한 그였지만 아직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는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수학을 열심히 파고들었지만 그렇다고 수학에 빠져 살 생각은 없었다. 무엇을 할지 결정된 것은 없었다. 솔직히 별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계획대로 굴러오질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국민들에게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전쟁을 통해 미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포화로부터 안전했던 미국은 전후 세계 경제 복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쟁 중에 남성의 자리를 대신했던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갔고 일자리가 넘쳐났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럽의 많은 곳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대형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넌 이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보면서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뉴욕은 그들에게 미국이었다. 뉴욕은 기회의 땅이었다.
오늘 존이 향한 곳은 IBM의 컴퓨팅 센터 건물이었다. 며칠 전 같은 과 친구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곳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뭐길래 그렇게 호들갑인지 그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거리를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사람이 많아졌다. 다운타운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IBM 컴퓨팅 센터의 입구에 들어서자 엄청나게 큰 기계 덩어리가 보였다. 스위치들이 많이 달려있고 여기저기서 전구가 번쩍거렸다. IBM이 개발한 최신 컴퓨터, SSEC(Selective Sequence Electronic Calculator)였다. 그는 마침 진행 중이던 가이드 투어에 합류했다.
가이드 투어 안내자는 열심히 SSEC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진공관, 릴레이, 펀치카드 등등…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급 오디오 장비를 만들려고 전자회로 공부를 잠시 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기계는 처음이었다. 갑자기 그는 호기심이 솟구쳐 올랐다. 이걸 만지작거리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설명이 끝나고 투어 일행이 모두 흩어지기 시작할 때 그는 안내자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건넸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이거 진짜 대단하네요.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수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여기서 이 컴퓨터와 관련된 일을 구할 수 있을까요?”
안내자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그럼요. 지금 당장 위층으로 올라가서 책임자를 만나시면 돼요.”
존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지금 제 옷이 말이 아닙니다. 옷 소매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구요. 제대로 옷을 입고 와야 합니다.”
그러자 안내자는 더욱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존은 당황스러웠다. 이미 안내자는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고 그는 쭈뼛거리며 따라갔다.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 그는 ‘로버트 시버Robert R. Seeber‘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의자에 앉아서 조금을 기다리자 비서가 와서 그에게 말했다.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는 상황에 존은 어리둥절해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방은 환했다. 그는 소매에 있는 구멍이 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걱정할 새도 없이 시버 씨가 그에게 인사를 청했다.
“배커스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SSEC를 책임지고 있는 로버트 시버입니다. 여기 자리에 앉으시지요.”
가볍게 악수를 나눈 후, 존은 시버 씨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들으셨겠지만 SSEC는 저희가 개발한 최신형 컴퓨터입니다. 아직 많은 이들에게 컴퓨터가 생소한 기계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답니다. IBM은 컴퓨터 개발을 함께 할 인재들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전해 듣기로는 SSEC 관련 일을 하고 싶으시다구요?”
“네.” 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최근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셨다고 하니 저희와 잘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간단한 질문을 하나 내어도 될까요?”
이제 와서 싫다고 할 수는 없는 일. 존은 좋다고 답하면서 동시에 긴장했다. 그냥 동네 마실 나오듯 구경 왔다가 이렇게 채용 면담을 하게 되다니. 그것도 구멍이 뻥뻥 뚫린 옷을 입고서.
시버 씨가 던진 문제는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존은 금세 답을 생각해냈다. 존의 답을 듣고 시버 씨는 미소를 지었다.
“정답입니다. 배커스 씨. 당신은 합격입니다. IBM에서 일하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입사 절차는 제 비서가 설명해 드릴 겁니다. SSEC 팀에서 앞으로 잘해 봅시다.”
“네?” 존은 뜨악했다. 세상에 이렇게 취직이 쉬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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