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비교적 젊은 시절의 찰스 바크먼​§​

찰스 윌리엄 바크먼(Charles William Bachman)은 1924년 12월 11일에 미국 캔자스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잘 나가는, 대학 미식축구 코치였고 그래서 다른 대학으로 스카우트될 때마다 가족은 이사를 해야만 했다. 그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시기에 부친이 미시간 주립 대학 코치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시간주 이스트 랜싱에 자리를 잡게 된다.​2​

학창 시절에 그가 아주 특출난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른바 모범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때 상위 10% 정도에는 포함되었다고 하며, 모든 과목을 열심히 하는 착한 학생이었다고 스스로 회고한 바가 있다.​2​ 특별한 일화가 있다면 11살 때 ‘종이박스 자동차 경주 대회Soapbox Derby‘에서 우승한 일이다. 당시 미국에서 아동을 대상으로 한 전국적인 행사였는데 1인승 종이 자동차를 만들어서 언덕을 내려가는 경기였다. 바퀴와 뼈대는 주최 측에서 제공했고, 좌석과 겉 틀은 참가자가 직접 박스 종이로 만들어야 했다. 현실적으로 그 대부분의 작업은 아버지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아무튼 그는 미시간주 이스트 랜싱의 지역 예선에서 1등을 해서 전국 본선에까지 나갔다.

그는 엔지니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미시간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는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 진학하는데 여기서 그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으므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곧 징병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능하면 일반병이 아니라 특별한 곳으로 배치받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을 한 학기 만에 마친 후 바로 졸업과 함께 대학에 입학했고 반년 만에 대학 1학년 과정 수업을 모두 끝냈다. 덕분에 그는 그해 여름에 입대했을 때 호주에 있는 장교 후보학교로 차출될 수 있었고 방공포대에 배치되어 군 생활을 보냈다. 이 방공포대에서 했던 경험은 후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제대 후 다시 미시간 대학교에 복학한 그는 기계공학으로 학사 졸업을 했다. 그는 열역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다. 미시간 대학교 공대 학과장에게 자문을 구한 그는, MIT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추천받았다. 그는 무작정 미 동부로 향했다. MIT에 도착한 그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대학원 입학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하루를 그냥 날려버린 그는 매사추세츠를 떠나 필라델피아로 갔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는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공대 학과장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열역학을 위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까지 온 그에게 예상치 못한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1948년 가을에 필라델피아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되어서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공대 대학원이 야간 학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생 대부분은 그 지역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었습니다. 같은 수업을 듣던 학생들 중에 프랭크 수로윅이라는 친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 (낮에는) 와튼 스쿨에서 수업을 몇 개 들어보는 건 어때?” 그래서 왈도 피셔라는 아주 유명한 노사관계 전문 교수가 하는 수업을 한 개 신청했습니다. 정말 수업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다음 학기에는 와튼 스쿨에서 3개의 수업을 들었습니다.​2​


1950년에 대학원을 졸업한 바크먼은 다우 케미컬에 입사했다. 엔지니어로 입사했던 그에게 처음 떨어진 일은 열역학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가 경영학 석사임을 알았던 상사는 그에게 비용 분석에 관한 일을 맡겼다. 다우 케미컬 공장에서 사용되고 있던 수량 조절 밸브water valve를 결정하는 문제였는데, 가격이 다른 두 개의 밸브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지를 정하는 일이었다. 가격이 비싼 밸브는 개폐에 사용되는 에너지가 적게 들었다. 결국 설치비용은 높지만 유지비용은 낮은 셈이었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 바크먼은 오늘날 DCF(현금흐름 할인법)라고 불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방법이 오늘날 경영학 석사 과정에서 필수로 다뤄주고 있지만 당시 와튼 스쿨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크먼은 자신이 직접 이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첫 번째 주어진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그에게 더 큰 일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일종의 자본 배분capital allocation 문제였다. 다우 케미컬의 주된 생산품 중 하나가 아스피린의 원료인 모노클로로벤젠monochlorobenzene이었다. 회사에서는, 모노클로로벤젠을 1톤 생산하기 위해서 원료와 전기가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 공정을 모두 파악하고 공정마다 투입되는 각종 자원들을 분석해야 했다. 이는 연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작업을 위해 바크먼은 펀치카드 기계를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대용량 자료를 처리하는 경험을 얻었다.

1957년에 다우 케미컬은 대형 전자식 컴퓨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고 중앙 데이터 처리실Central Data Processing이라는 부서를 신설했다. 바크먼은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우 케미컬이 도입할 컴퓨터는 IBM에서 출시하기로 예고한 IBM 709 모델이었다. 바크먼은 열정적으로 인재를 끌어들였고 IBM 704 및 IBM 709 모델 사용자들로만 구성된 SHARE 사용자 모임에도 참여했다.

SHARE는 IBM 컴퓨터 사용자들이 정보와 프로그램을 교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구성한 단체였다. IBM은 직접 관여하지 않고 측면에서 지원해주는 정도였다. 당시는 프로그래밍 자체도 힘들었지만 프로그래머를 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공유하는 활동이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과학계산용 프로그램이었다. 바크먼은 정보 데이터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데이터 처리 위원회Data Processing committe를 구성하고 첫 의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GE의 ‘리포트 생성 프로그램Report Generator‘을 참조하여 IBM 709 용 자료 처리 프로그램인 9PAC 개발을 주도했다.


IBM 709 도입을 기대하며 열심히 활동하던 바크먼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50년대 들어 끊임없이 몸집을 키워오던 다우 케미컬이 갑자기 구조조정에 돌입한 것이다. 그가 맡았던 데이터 처리 위원회 조직은 많이 축소되었고 IBM 709 도입도 취소되었다. 더 이상 다우 케미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바크먼은 SHARE를 통해 알게 된 업체 사람들을 통해 여러 회사와 접촉했고 1960년 12월에 GE의 생산 통제 서비스Production Control Service 부서에 입사했다.

GE의 생산 통제 서비스 부서는 전사 조직이었다. GE는 제품별로 조직이 구성되어 독자 경영을 하는 구조였는데 생산 통제 서비스 부서는 이 모든 제품별 조직들 사이에 중복될 수 있는 생산 자원의 비효율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그가 입사했을 때 이미 이 부서는 ISP(Integrated System Project)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였다. 생산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찾는 프로젝트였는데 많은 인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진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경영진은 프로젝트를 다시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ISP II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스탠 윌리엄스가 팀장이었고 찰스 바크먼과 호머 카니가 풀 타임 팀원이었다.​¶​ 여러 사업부에서 파견 형식으로 참여하는 팀원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시스템이 자신의 사업장에 적합한지를 평가하는 일을 했다.

ISP II 프로젝트팀은 자체 사무실이 없었다. 사업부 중에서 뜻을 함께할 곳을 찾아 그곳에서 일을 진행해야 했다. 다행히 GE의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에서 손을 들었다. ISP II팀은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냈고 이를 바탕으로 시스템을 제안했으나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는 불참을 선언했다.

GE의 사업부는 매우 독립적이었습니다… 사업부의 대표는 성과에 의해 보상받았습니다… 최고 경영진들은 별로 간섭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수익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에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건물을 고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지붕에서 물이 새고 있었지만 지붕을 고치는 데 돈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결산할 때 장부에 나타나는 수익이 줄어들 테니까요.​2​

하지만 다행히 같은 건물에 있던 저전압 개폐기 사업부에서 ISP II 팀이 제안한 시스템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ISP II팀이 구현한 시스템의 이름은 MIACS라고 불리었다. 사업부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기는 했으나 생산을 위한 정보 및 제어 시스템이었다. MIACS는 생산을 위한 자원과 일정 배분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상황을 피드백 받아서 생산 현장을 통제하는 일을 했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전자식 컴퓨터의 사용은 필수였다. 사용된 컴퓨터는 GE가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던 GE 225 모델이었다.


MIACS가 정보를 다루는 방식은, 과학계산용 프로그램과 달랐다. 숫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이 모여서 하나의 단위(레코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 단위에 대해 생성create, 접근read, 수정update, 삭제delete 등의 동작이 있어야 했다. 바크먼은 이렇게 정보를 조작하기 위해서는 자기 테이프와 같이 순차적 접근만 허용하는 저장장치가 너무도 비효율적임을 알았다. 마침 임의 접근random access이 가능한 자기 디스크 저장장치가 시장에 등장한 상황이었다. 바크먼은 자기 디스크 도입을 적극 추진했다. 그리고 임의 접근 방식의 저장장치에 최적화된 정보 처리 방식을 고민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IDS(Integrated Data Source)이다. 이제 프로그래머는 저장장치에 정보를 쓰고 읽을 때 ‘키key‘ 값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주민등록번호만 있으면 해당 인물의 정보를 저장장치에서 바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의 접근 저장장치에서 이런 방식의 정보 관리 시스템은 처음이었다. 후에 이런 방식에 데이터베이스database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이름을 처음 정한 이도 찰스 바크먼이었다.

IDS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네트워크 방식의 데이터베이스 구조는 비즈니스용 프로그램에서 필수 요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GE 내부에서만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상품으로 GE 컴퓨터와 함께 공급되기 시작했다. IDS의 첫 외부 사용자는 웨어하우저Weyerhaeuser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목재 회사인 웨어하우저는 주문처리를 자동화하기 위해 GE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런데 웨어하우저는 주문 입력을 수작업으로 받지 않고 통신선을 통해 받을 생각이었다. 미국 전역에 있는 사무실에서 텔레타이프로 주문을 입력하면 메시지가 통신선을 통해 본사 전산실로 전달되고 이를 메인 컴퓨터가 처리하는 식이었다. GE 내부에서 사용할 때는 펀치카드로 입력을 받았기 때문에 한 번에 하나의 입력만 처리하면 되었으나, 웨어하우저에서는 수십 개의 통신선을 통해서 메시지가 동시에 전달될 수 있었으므로 동시처리 기능이 필요했다. 바크먼은 최초로 다중처리 DBMS 기능을 IDS에 추가했다.

IDS는 찰스 바크먼이 두 번째로 직접 작성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접한 적이 없었으며 처음 전자식 컴퓨터를 알게 된 것은 다우 케미컬에서 펀치카드 기계를 다루면서부터이다. 그의 첫 프로그래밍은 IBM 650 모델에서 포아송 분포 처리 루틴을 작성한 것이었다. 후에 데이터 처리 위원회를 맡았을 때는 IBM, 레밍턴 랜드Remington Rand 등을 방문해서 전자식 컴퓨터를 견학했고 2주의 프로그래밍 교육 과정을 듣기도 했었다.


찰스 바크먼은 CODASYL이라는 표준 그룹 활동에 참여하여 IDS를 표준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했다. 그는 IDS를 기반으로 하는 데이터베이스 명세서를 작성했다. 그가 작성한 명세서에 기반하여 다양한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1970년대에 데이터베이스는 대표적인 기업용 소프트웨어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CODASYL에 기반하여 IBM 360 용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한 회사로 B.F. Goodrich라는 곳이 있었다. 이 회사는 후에 컬리네인Cullinane이라는 회사에 인수되는데 1980년대 초에 찰스 바크먼은 컬리네인에서 일하기도 했다.

1960년대가 저물면서 GE는 컴퓨터 사업에서 손을 떼는 결정을 내렸다. 업계의 1, 2위가 아니면 미련 없이 버린다는 GE의 기준 때문이었다. 하니웰이 GE를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바크먼도 하니웰 사람이 되었다. 하니웰에서 바크먼은 데이터베이스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SPARC이라는 표준 그룹에서 3단계 스키마three schema 개념을 정리했는데 이 기종 컴퓨터 간의 데이터베이스 호환을 위해 데이터베이스의 스키마를 3단계로 구성했다. 컴퓨터 구조에 무관하게 모든 컴퓨터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스키마를 정의하고, 실제로 이를 컴퓨터의 특성에 맞게 구현하는 스키마는 해당 시스템마다 별도로 구현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방식은 그가 OSI에서 컴퓨터 네트워크를 표준화할 때 표현 계층Presentation Layer을 추가하도록 만들었다. IBM의 SNA 네트워크는 6개의 계층layer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도입하면서 응용프로그램이 데이터의 포맷을 신경 쓰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표현 계층이 추가되었다.

1970년대를 하니웰에서 보낸 바크먼은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컬리네인이라는 데이터베이스 전문업체로 자리를 옮겼으나 몇 년 후에 나와서 직접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웠다. 그는 데이터 구조도Data structure diagram를 컴퓨터로 그리고, 이것을 바로 데이터베이스 스키마로 변환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했다.

1996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한 그는 2017년 7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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