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정적이 흘렀다. 발표를 마친 바크먼은 플립 차트를 다시 정리했다. 뒤로 넘어가 있던 차트 종이들을 모두 앞으로 되돌린 후, 그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준비했고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시선은 고전압 개폐기High Voltage Switchgear 사업부 책임자인 밥 비먼을 향했다.
“으흠.” 목을 가다듬는 헛기침을 하면서 비먼은 입을 열었다. “음… 미안하지만 나는 이 프로젝트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2
이런 젠장. 바크먼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일까? 지난 일 년 동안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우 케미컬에서 갑자기 구조조정이 벌어지고 그에게 약속한 대형 컴퓨터 구매가 물 건너갔을 때 그는 더 이상 회사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가깝게 알고 지내던 GE 직원의 추천으로 뉴욕시에 있는 GE 생산 통제 서비스 부서로 이직했다. 그 부서는 GE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산 일정, 재고 관리 등을 검토하는 전사corporate level 조직이었다.
그에게 떨어진 일은 ISP II였다. ‘통합 시스템 프로젝트(Integrated System Project)’의 두 번째 버전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GE 전사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제조 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었다. GE는 엄청나게 큰 회사였다. 약 100개의 제조 사업부들이 있었다. 이 사업부들은 매우 독립적이었다. 사업부를 평가할 때는 사업부 단위로 작성된 수익 보고서가 사용되었으며 각자 별개의 제조 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2 고위 경영진들은 중복을 없애고 회사 전체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을 원했다. 어떤 시스템이 만들어질지 아무도 몰랐지만 미리 정해진 이름은 MIACS(Manufacturing, Information and Control System)였다.
팀장을 포함하여 그와 다른 한 명의 전담 직원으로 구성된 ISP II 팀은 일단 협업을 할 만한 현장 부서를 찾아야 했다. 실제 제조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분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뜻 현장을 외부 직원에게 공개하겠다고 나서는 사업부는 없었다. 다행히 필라델피아에 있던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7층 높이의 오래된 공장 건물에는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 외에도 중전압 개폐기Medium Voltage Switchgear 사업부, 저전압 개폐기Low Voltage Switchgear 사업부도 함께 있었다.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를 둘러보던 ISP II 팀은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이 부서가 사용하고 있던 공간의 이곳저곳에는 커다란 운반통이 놓여 있었다. 금속 재질의 이 운반통 안에는 부속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고, 손잡이에는 여러 장의 펀치카드 종이가 달려 있었다. 펀치카드에는 해야 할 작업 내용과 마감일이 적혀 있었다. 작업자는 그 운반통에 붙어 있는 펀치카드를 보고 무슨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작업의 진행 일정을 관리하는 주체가 없었다. 어떤 운반통의 작업을 마친 후에는, 주변에 있는 다른 운반통을 무작위로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마감일을 넘긴 운반통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잊혀 있던 운반통은, 고객이 물건을 찾으러 공장에 나타나면 그제서야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찾는 물건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 고객은 화를 냈고, 그러면 독촉하는 임무를 맡은 직원들expediter이 공장을 뛰어다니면서 해당 운반통을 찾았고 작업 진행을 독촉했다.2
바크먼은 이런 상황을 보고 군대 시절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태평양 뉴기니 지역에 있던 방공포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었다. 당시에 그의 부대는 일본 폭격기를 격추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동하는 비행기의 위치를 예측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했다. 즉, 일본 폭격기가 날아가고 있을 때 폭격기의 위치를 두 번 샘플링하여 이동 경로를 예측하고 포탄의 발사 속도까지 계산하여 포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였다. 왜냐하면 일본 폭격기는 그럴 줄 알고 비행 중에 계속 방향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폭격기를 맞추려면 실시간으로 계속 폭격기의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바크먼은 GE의 제조 현장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GE는 제조 관리를 위하여 이미 컴퓨터를 도입한 상황이었다. 어떤 제품의 생산이 결정되면 필요한 자재와 일정이 컴퓨터를 통해 계산되고 펀치 카드에 입력되어 운반통에 부착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컴퓨터가 제조 상황을 추적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주문이 입력되면 자재 및 생산 자원을 할당하고, 현장에서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려니 문제가 있었다. 현장에서 피드백을 받고 이를 반영하여 내부 정보를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기존의 자기테이프 방식 저장장치로는 한계가 있었다. 어떤 제품의 정보를 수정하려면 테이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봐야 하는데, GE가 생산하는 제품의 수는 실로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정보를 생성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저장장치가 필요했다. 바크먼은 이 숙제를 풀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침 이때 자기 디스크라는 새로운 저장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테이프보다 용량은 작지만 임의 접근이 가능하고 빠른 접근 시간을 보장하는 하드웨어였다. 바크먼은 자기 디스크가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임의 접근 저장장치를 활용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지원도 필요했다. 그는 가상 메모리virtual memory 시스템과 페이징paging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면 프로그래머는 메모리 용량을 고민하지 않고 데이터를 다룰 수 있고, 빈번한 디스크 접근을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이런 방식으로 작은 크기의 저장 데이터를 빠르게 생성, 접근, 수정, 삭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그는 IDS(Integrated Data Store)라고 이름 붙였다. MIACS는 IDS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 관리 시스템이 되는 셈이었다.
이렇게 일 년이 넘는 시간을 공들인 후에 마침내 그 결과물을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를 비롯하여 다른 관리자와 경영진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었을 때 바크먼은 그의 노력이 분명히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동안 든든한 후원자처럼 여겨졌던 고전압 개폐기 사업부가 이렇게 발을 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바크먼은 팀장과 동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두 난감한 표정이었다. 일 년을 함께 했던 사업부마저 이렇게 돌아선다면 다른 사업부들을 설득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 자명했다. 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말을 잃고 멀리 창밖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