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마누엘 블럼(Manuel Blum)은 1938년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루마니아 사람이었는데 밖에서는 루마니아어를 사용하지만, 집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이 베네수엘라로 이민을 온 후에도 집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했고, 마누엘 블럼은 스페인어가 아닌 독일어를 먼저 배웠다.
4살 때 그는 아메바성 이질에 걸렸고 이를 마땅히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이 근방에 없어서,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처음에 마이애미에 정착했던 그들은 블럼의 병이 낫자 뉴욕으로 이사했다. 블럼은 뉴욕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의 부모는 다시 베네수엘라로 돌아가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마누엘이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위해서 미국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길 원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블럼은 미국으로 돌아왔고 군사 고등학교military school에 입학했다. 그의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MIT에 입학했다. 후에 그는, 왜 MIT에서 입학을 허락했는지 모르겠다고 자주 이야기했다.1
그는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부모는 엔지니어가 돈을 잘 벌고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믿었고 그는 부모의 뜻을 따랐다. MIT에서의 첫해는 매우 힘들었다. 물리를 좋아했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은 D+였다. 그는 초 중 고등학교 때 배웠던 대로 암기 방식으로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물리 공부를 하고 있던 그를 본 학과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야, 암기하지 마. 너는 F = ma 공식을 알고 있잖아.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을 거기에서 끌어내야지. 암기하면 어떡하냐1
그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암기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서 공식을 끌어내면 되었다. 그다음부터 그의 물리 성적은 올라가기 시작했고 결국 A를 받게 된다.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MIT에서는 공대생이더라도 인문학 학점을 필수로 채워야 했다. 블럼은 서양 문명에 관한 수업을 신청했다가 담당 교수가 마음에 들어서 그 교수의 전공과목까지 듣게 되었다. 프로이트에 관한 과목이었고 그는 프로이트의 저서 24권을 모두 독파하면서 프로이트 지지자가 되었고 교수와도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에서 그 교수는 블럼을 보더니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 학교에 워런 맥컬록이라는 박사가 있는데 그는 반 프로이트 파라네. 그 사람을 한 번 찾아가서 만나보지 그러나?1
그렇게 해서 블럼은 맥컬록과 월터 피트를 만나게 되었고 맥컬록의 신경생리학 연구실에 출입하면서 수학적 증명법에 눈을 뜨게 된다. 수학에 빠져 버린 그는 1964년에 MIT 박사 과정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수학으로 바꾼다. 맥컬록의 뉴런 이론을 접하면서 논리 회로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수학에서 논리를 다루는 방법을 공부하다가 계산가능성 이론computability theory에 끌리게 된다.†
블럼은 당대의 유명한 두 컴퓨터 과학자의 지도를 받는 행운도 얻었다. 우선 그의 박사 논문 지도 교수는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던 당사자 중 한 명인 마빈 민스키였다. 그리고 또 한 명은 계산복잡도computational complexity를 처음으로 제안했던 마이클 래빈이었다. 당시 MIT에 방문 교수로 있던 마이클 래빈은 자신의 논문 하나를 블럼에게 읽으라고 건네주었는데, 증명 부분이 빠져 있는 논문이었다. 덕분에 블럼은 직접 그 증명을 고안해 냈고 이는 그의 박사 논문2 작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MIT에서 조교수로 2년을 보낸 후,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001년에 카네기멜런 대학교로 옮길 때까지 버클리에서 눈부신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먼저 1971년에는 숫자의 집합에서 중간값median을 찾아내는 새로운 알고리듬3을 발표했다. 이 알고리듬은 입력으로 사용되는 숫자의 개수에 비례하는, 즉 선형linear time의 성능을 보장했다.
그는 많은 제자를 두었다. 그는 제자들로부터 자신이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수론number theory이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내가 대학원 학생들에게 가르쳐 준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수론이 그 한 예입니다… 나를 수론의 세계로 이끈 사람 중 한 명이 렌 애들먼‡입니다.1
그의 수론 사랑은 암호학으로 연결된다. 그는 1982년에 ‘동전 던지기coin flipping‘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4. 이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온라인 상에서 가능한 동전 던지기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 방법의 배경에는 소수 발생과 소인수 분해 이론이 있었다. 이 이론은 후에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으로 이어졌다5.
영지식 증명 이론을 함께 한 사람 중 한 명인 실비오 미칼리§는 영지식 증명을 발표하기에 앞서서 버클리에서 블럼의 지도를 받는 박사 과정 학생이었다. 블럼은 미칼리와 함께 의사 난수pseudo random 함수 이론을 발표했고6, 후에는 그의 부인인 르노어 블럼 및 마이클 셔브와 함께 의사 난수 발생기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7.
그는 샤피 골드와서¶와 함께 공개키public key 암호화 방법을 발표했다8. 이 방법은 또 다른 유명한 공개키 암호화 방법인 RSA와는 다르게 수학적으로 난이도가 증명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프로그램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9. 비록 그 결과물이 현장에서 일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 분야의 연구를 촉발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90년대 후반에 블럼은 부인과 함께 홍콩에서 방문 교수로 몇 년을 보낸 후에, 돌연 버클리를 떠나 카네기멜런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또 한 번 흥미로운 결과물을 발표했다. 그것은 바로 캡차CAPTCHA이다10. 캡차는, 컴퓨터의 사용자가 사람인지 아니면 인공의 프로그램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이다.
캡차는 리캡차reCAPTCHA라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사용자에게 질문하고 그 답을 통해 컴퓨터가 추가 학습을 하게끔 한다.
마누엘 블럼은 현재도 카네기멜런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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