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르트는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여성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워스 박사님. 여러 번 불러도 반응이 없으셔서…” 그제서야 비르트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강연 원고에 정신이 팔려서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박사님. 발표가 10분 남았으니 이제 연단 옆으로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상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 그녀는 길을 인도하려는 듯 몸을 돌렸다. 비르트는 읽고 있던 원고를 손에 들고 일어섰다.
비르트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알아채지 못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원래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고향에서는 그의 이름을 ‘비르트’라고 발음했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 사람들은 그를 ‘워스’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미국식으로 발음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제대로 된 발음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냥 미국식 발음에 그도 익숙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가끔은, 특히 지금처럼 뭔가에 집중했을 때는 여전히 미국식 이름에 반응하지 못하곤 했다.
오늘 그가 참석한 행사는 국제정보처리연맹(IFIP)이 주관하는 국제 학술대회였다. 얼마 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에 조교수로 채용되었고, 알골 언어를 개선하는 연구로 주목받고 있었다. 오늘 발표는 그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내용이었다.
강연장 전면의 왼쪽 구석에 선 비르트는 사회자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를 기다렸다. 세션의 진행을 맡은 이는 대학원 시절에 잠시 지도받았던 네덜란드의 베이하든 교수였다. 그는 알골 언어 설계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면 다음 발표를 맡은 젊은 연구자를 소개하겠습니다. 그의 고향이 있는 유럽에서는 ‘이름을 따라by name‘ 비르트라고 불리지만 이곳 미국에서는 ‘값을 따라by value‘ 워스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2
박수 소리 속에 연단에 오른 비르트는 웃음이 번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청중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이 유머가 그들 사이의 연대감을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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