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라빈(왼쪽)​*​과 데이나 스콧(오른쪽)​†​

래빈과 나는 1957년에 IBM 여름 단기 인턴 일을 하면서 오토마타 이론에 관한 작업을 함께 했다. 이미 그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했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잘 다듬어서 선명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때는 기계를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유한 상태를 사용하는 그 접근 방식은 부분적으로만 성공한 듯싶다. 실용적으로 뭔가를 이끌어 내는 방식은 아니었다.

1976년 튜링상 수상 강연 중에서​1​

래빈과 스콧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여름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아침이었다. 단단하게 지어 놓은 저택 건물은 오전의 열기가 뚫기에 두터웠지만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내부의 공기를 서서히 끌어 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래빈, 뭐 좀 생각해 본 거 있어?” 스콧이 넌지시 물었다. 래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후, 천천히 두 손으로 컵을 돌리기 시작했다.

“글쎄, 내가 하고 싶은 걸 그냥 할 수는 없겠지?” 래빈은 왼쪽 눈을 살짝 찡긋하며 미소를 흘렸다. 정통 수학을 전공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컴퓨터 회사의 인턴십은 어찌 보면 어색한 옷과 같았다. 캠퍼스를 찾아와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IBM 직원에게 넘어간 것은, 상당히 괜찮은 금전적 대우가 한몫했지만 전자식 컴퓨터라는 흥미로운 기계를 생산하기 시작한 회사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IBM은 커다란 도전을 맞이했다. 제표기Tabulating machine 시장을 거의 독점했던 IBM은 사무 통계 자동화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전자식 컴퓨터의 등장은 큰 지각 변동을 예고했다. 자칫하면 시장을 통째로 내어줄 판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미 공군의 방공망 시스템에 사용될 전자식 컴퓨터의 공급권을 따낸 것이다. MIT가 개발한 프로토타입을 받아서 대량 생산하는 프로젝트였다. IBM은 이를 통해서 전자식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한편, 전자식 컴퓨터의 밝은 미래를 확실하게 확인했다. 1952년에 부친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토머스 왓슨 2세는 전자식 컴퓨터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했고, 1956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부친의 이름을 딴 왓슨 연구소Watson Research Center를 세우고 현대적인 최신식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왓슨 연구소를 채울 인재를 구하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IBM의 인사담당자들은 미국의 유명 대학을 훑기 시작했다.

프린스턴의 수학과는 미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아울러 컴퓨터의 구조를 정립한 폰 노이만 박사가 몸담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곳을 IBM이 빠뜨릴 리 없었다. IBM 직원들은 프린스턴 캠퍼스를 돌아다녔고 당시 이제 막 박사학위를 받은 마이클 래빈과 아직 박사과정에 있던 데이나 스콧에게 여름 인턴십을 제의했다.


래빈과 스콧은 둘 다 처치Alonzo Church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 중이었다. 한 살 터울이었던 두 사람은 처음부터 마음이 통했다. 그래서 IBM으로부터 인턴십 제의를 받았을 때도 의기투합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을 태운 버스는 허드슨 강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순간 강에서 멀어진다 싶더니 좁은 도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갈림길을 거치면서 길은 점점 더 좁아졌다. 양편으로 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는 좁은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멈춰 선 곳은 큰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버스는 천천히 비탈길을 올라갔다. 곧 너른 잔디밭과 함께, 견고해 보이는 본관 건물이 나타났다. 본관 주변에는 작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IBM은 새로 짓고 있던 왓슨 연구소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임시로 근처에 있던 대저택을 임대해서 연구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본관과 부속 건물들에 여러 부서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 대저택은 로버트 램Robert Lamb 가문의 소유였다. 하지만 IBM이 임대할 때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비어 있는 곳이었다. 그전까지는 정신병자들을 가두어 놓는 곳으로 쓰였다. 돌과 벽돌로 빼곡히 싸여 있는 건물의 외관을 보면 그 어떤 병자도 이곳에서 탈출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래빈과 스콧은 정보 이론 부서Department of Information Theory로 안내되었다. 이곳은 클로드 섀넌의 정보 이론이 컴퓨팅의 주춧돌이라고 믿는 부서였다. 솔직히 래빈과 스콧과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오토마타를 해보면 어떨까?” 스콧이 말했다. 마침 얼마 전에 논리학자 존 마이힐John Myhill이 프린스턴에서 했던 오토마타 강연이 떠올랐다.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래빈은 귀가 솔깃했다. IBM 연구소에서 순수 수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토마타Automata는 수학과 컴퓨팅이 접점을 가지는 주제였다. “그러면 튜링 기계처럼 테이프를 입력으로 받는 유한 상태finite-state 기계를 한 번 정리해보자.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네.”

“하지만 이미 있는 것들을 정리만 하면 좀 그럴 것 같아. 그래도 뭔가 새로운 것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스콧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기존의 모형에서 개선점을 생각해보자. 뭐가 있을까? 음… 내부 상태의 개수를 줄이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래빈이 질문을 던졌다.

“글쎄, 좀 고민해보지.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스콧이 감았던 눈을 뜨면서 말했다.

어느새 새소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여름의 해는 점점 높이 오르고 있었고 건물은 조용하면서도 분주했다. 두 사람에게 일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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