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존 매카시(John McCarthy)는 1927년 9월 4일에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가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열렬한 공산당원이었다. 그래서 존 매카시도 젊을 때까지는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다. 러시아어를 잘 구사한 그는 소련 과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소련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 결국 그는 보수적인 공화당원으로 바뀌었다.2
그는 어렸을 때 병치레가 잦았다. 그의 건강을 위해서 부모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수학에 일찍 재능을 보였던 그는 10대 시절에 집 근처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서 사용하던 수학 교과서를 구해서 미리 공부할 정도였다. 1944년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수학 과목을 2년이나 월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체육 시간을 싫어했는지 그는 체육 수업에 계속 결석했고 결국 정학 처분을 받았다.3 미 육군에 입대하여 잠시 군 복무를 한 후 다시 복학한 그는 1948년에 무사히(?) 졸업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1년 후에 당시 미국에서 수학 분야의 최고 학교였던 프린스턴 대학교로 옮겼다. 여기서 그는 폰 노이만과 딱 한 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나는 폰 노이만과 단 한 번 면담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인공지능에 관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말했습니다. 인간의 뇌와 그 주변 환경을 유한 오토마타finite automata로 표현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게 용기를 북돋워 줬습니다. “논문으로 써 보게. 논문을.”이라고 그는 말했죠. 하지만 그와 대화를 더 나눈 후에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 아이디어는 별로였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라는 것을 유한 오토마타로 표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4
수학 영재였던 매카시가 갑자기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48년 9월에 열렸던 힉슨 심포지엄Hixon Symposium때문이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열렸던 이 심포지엄은 ‘대뇌의 메커니즘과 행동’을 주제로 했고, 소수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모아서, 대뇌의 동작 방식을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해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존 폰 노이만을 위시하여 막스 델브뤽, 라이너스 폴링, 워런 맥컬럭 등과 같이 당대의 대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카시는 이 심포지엄에서 처음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회상하곤 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실제 그 심포지엄의 발표집에는 컴퓨터로 인간의 지능을 흉내 내는 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4
어찌 되었건 1951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그는 편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년 정도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1952년 여름에 그는 벨 연구소에서 일했는데 이때 클로드 섀넌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고, 이를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인공지능에 관한 논문을 모아서 책으로 펴내 보자는데 의기투합했다.5 이 책이 완성되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매카시는 스탠퍼드 대학교 수학과의 조교수로 채용이 되었지만 2년 만에 자리를 잃었다. 3명의 후보 중 2명만 뽑는 재계약 심사에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다트머스 대학의 수학과 조교수로 임용되면서 다시 미국 동부로 넘어왔다.
섀넌과 함께 준비한 책은 <오토마타 연구>6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포함된 논문의 대부분은 책 제목처럼 오토마타 위주였고 그가 원하던 ‘인공지능’에 관한 글은 드물었다. 그래서 매카시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로 마음먹는다. 힉슨 심포지엄처럼 사람들을 모아서 직접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IBM의 내다니얼 로체스터가 뜻을 함께 했고, 여기에 벨 연구소의 클로드 섀넌과 하버드 대학교의 마빈 민스키도 합류했다. 네 사람은 공동의 이름으로 워크샵 제안서를 작성했는데 매카시는 오토마타라는 이름보다 좀 더 호소력이 있는 표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를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느냐를 놓고 이견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사실, 매카시 본인도 그럴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실하게 다른 사람이 먼저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트머스 여름 워크샵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거기서 다룰 내용을 부를 표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단어를 그 전에 어디선가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출처를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4
1958년에 매카시는 MIT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MIT에 합류한 마빈 민스키와 함께 인공지능 연구소를 시작했다. 여섯 명의 대학원생과 두 명의 프로그래머로 시작된 이 연구소에서 매카시는 리스프LISP 언어를 개발했다. 리스트List 구조에 기반한 리스프 언어는 인공지능 연구자의 필수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다.
리스프 언어를 개발하면서 그는 조건문conditional statement과 재귀적 호출recursion을 다듬었다. 알골Algol 언어 위원회에 참여한 그는 이 경험을 살려서 알골 언어에 조건문과 재귀적 호출이 포함되도록 만들었다.
인공지능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그는 기존의 일괄처리 시스템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 번에 한 개의 프로그램만 처리할 수 있는 일괄처리 방식에서는 컴퓨터 사용 시간을 할당받아야 했다. 그 시간이 길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했다. 컴퓨터는 비싼 자원이었으므로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간을 할당했다. 그러다 보니 리스프 언어로 프로그램을 작성한 후에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사소한 실수로 인해 오류가 발생하면 낭패였다. 간단한 수정을 한 후 다시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니 답답했다. 그래서 매카시는 한 번에 여러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안했다. 컴퓨터의 시간을 잘게 쪼갠 후에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시간 훔치기time-stealing라고도 불렸지만 후에 이 방법은 시분할time-sharing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MIT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62년에 홀연히 스탠퍼드 수학과로 이직했다. 정교수 자리는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인공지능과 시분할 시스템에 대한 열정은 스탠퍼드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기반으로 하는 시분할 시스템인 토르Thor를 개발했고, 논리logic에 기반하는 기호주의 인공지능Symbolic AI 연구를 진두지휘했다.
1965년에 스탠퍼드 대학교는 컴퓨터 과학과를 신설했고 매카시는 자연스럽게 컴퓨터 과학과 소속이 되었다. 그는 정부 기관으로부터 받은 연구자금을 바탕으로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SAIL를 만들었다. 스탠퍼드 인공지능 연구소는 MIT의 인공지능 연구소와 선의의 경쟁을 펼쳤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들은 인공지능 분야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컴퓨터 산업 및 학계의 발전을 이끌었다.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을 목표로 삼았던 매카시는, 단순히 지식knowledge만이 아니라 신념belief까지도 모델링하려 노력했다. 인공지능에 대한 비관론이 대두되면 그는 항상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은퇴할 때까지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쓴 그는 2011년 10월 24일에 스탠퍼드 근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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