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어린 시절(왼쪽), 젊은 시절(오른쪽)​†​

마빈 민스키(Marvin Lee Minsky)는 1927년 8월 9일에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곤 했는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도 그랬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재미있는 선생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들과는 다른 아이들이 많이 있었죠. 나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아는 것이 많았습니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내 부친의 현명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운이 좋았습니다…. 뛰어난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내가 4학년일 때 화학책을 읽는 모습을 본 선생님이 나에게 실험실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박사학위자였죠. 194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죽음을 피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미국으로 도피한 박사들이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을 했습니다. 솔직히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거기 애들이 고등학교 때 내 급우만큼 똑똑해 보이지 않았답니다.​2​

뉴욕의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앤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가 미 해군에 입대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군 복무를 했고 제대 후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는 다양한 관심사를 보였다. 친구였던 제레미 번스타인Jeremy Bernstein은 민스키의 전공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다고 말하기도 했다.​3​ 민스키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대학교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연구실에 그냥 불쑥 들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나는 학부생이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학과에서 사람들이 어디서 차를 마시는지는 알았죠. 그래서 그냥 찾아가서 과자를 얻어 먹으면서 그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다들 얘기해주었습니다.​3​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를 않았다. 그들은 민스키에게 연구실을 써도 좋다고 허락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민스키는 물리학과 실험실에서는 광학 실험을 했고, 동물학과 실험실에서는 가재 해부를 했으며, 심리학과 실험실에서는 스키너B.F. Skinner가 이끄는 팀의 실험을 구경했다. 이렇게 여기저기에 관심을 쏟다 보니 그의 학점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를 만회하기 위해 멋진 논문을 쓸 생각을 했지만 당시 물리학과는 학부생에게 졸업 논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때 그와 친하게 지내던 앤드류 글리슨Andrew Gleason​§​이 그에게 수학 쪽으로 논문을 써보라고 제안했다. 수학과는 학부생에게 졸업 논문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민스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원구sphere상의 고정점에 관한 흥미로운 이론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4​

이 논문 덕분에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원래는 하버드 대학교를 떠나기 싫었지만 글리슨이 다른 학교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4​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하는 동안, 그는 최초의 신경망 학습 기계로 알려진 SNARC(Stochastic Neural Analog Reinforcement Calculator)를 만들었다. 진공관, 커패시터, 자전거 체인 등으로 만들어진 이 기계는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을 할 수 있었다. 민스키는 신경망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 나갔고 박사논문 주제도 SNARC를 확장하고 문제점을 개선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들도 그의 논문이 조금은 난감했던 모양이다. 당시 수학과 학과장이었던 존 튜키John W. Tukey는 민스키의 논문지도 교수였던 폰 노이만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기는 한 것 같은데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걸 정말로 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폰 노이만은 이렇게 답했다. “글쎄요 지금은 아닐 수 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북돋워 줍시다.”​4​


1954년에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민스키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 교수(펠로우) 자리를 구했다. 원래 그는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에 신설된 시스템 분석 학과로 이미 자리를 옮긴 상태였으나 당시 미국을 휩쓸던 매카시 광풍​¶​으로 인해 해당 학과의 주요 구성원들이 자리를 잃으면서 학과가 와해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때 글리슨이 그를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 교수로 추천했고, 존 폰 노이만, 클로드 섀넌, 노버트 위너 등의 추천을 얻어 연구 교수로 선정되었다.

수학 전공 연구 교수가 되기는 했지만 민스키는 수학보다는 지능intelligence에 마음이 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연구 교수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4​ 오히려 그는 프린스턴 대학원 동기였던 존 매카시를 비롯하여 클로드 섀넌 등과 교류하면서 다트머스 인공지능 워크샵을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공초점 현미경Confocal scanning microscope을 발명했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신경망을 관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명되었고 특허까지 받아놓았으나 실제 구현을 위해 필요한 레이저 기술과 컴퓨팅 기술이 부족하여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약 20년 후에 이 발명은 재평가되면서 현실화되었고 현재는 생물학과 재료과학에서 기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1957년에 MIT의 링컨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민스키는 1959년에 MIT의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리고 이미 그곳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던 존 매카시와 함께 인공지능 연구소AI Lab를 만들었다. 민스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와 매카시는 몇 명의 학생을 데리고 인공지능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복도에서 (당시 전자연구소 소장이던) 제리 위즈너와 마주쳤는데 그는 우리에게 잘 지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한 다음에, 작은 연구실과 대학원생 서너 명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자연구소 부소장) 헨리 짐머먼을 만나보겠다고 하더니 그가 연구소를 만들어 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틀 후에 방이 서너 개 붙어 있는 연구소 공간을 배정받았고 엄청난 연구비를 지원받았습니다. 그 돈은 IBM이 컴퓨터 과학 발전을 위해 MIT에 기부했던 돈인데 어디에 써야할 지 몰라서 가만히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2​

조건 없이 제공되는 연구비를 바탕으로 MIT의 인공지능 연구소는 컴퓨터 연구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961년에 민스키는 <인공지능으로 가는 단계들>​5​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당시까지의 인공지능 연구를 정리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 주제가 놓여 있는지를 소개하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젊은 연구자들이 인공지능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인공지능 연구소에서는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자동 수학 문제 풀이, 체스 게임, 로봇팔, 카메라를 이용한 물체 인식, 헤드 마운티드 디스플레이HMD 등이 이루어졌고 컴퓨터를 교육에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1969년에 민스키는 시모어 페퍼트Seymore Papert와 함께 <퍼셉트론>​6​이라는 책을 써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퍼셉트론은 1958년에 프랭크 로젠블랫Frank Rosenblatt이 발표했던 신경망 모델이다. 이는 매컬록-피츠의 신경망 모델을 더 고도화한 것으로서 인간의 감각 기관이 학습하는 메커니즘을 구현할 수 있어서 크게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민스키는 페퍼트와 함께 이 퍼셉트론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였고 퍼셉트론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했다. 이로 인해 신경망 모델은 한동안 인공지능 연구에서 우선순위가 밀리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후에 민스키가 지적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발견되었고 신경망 모델은 딥러닝의 핵심 이론으로 다시 부각되었다.

신경망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 민스키는 기호 표현symbol representation 방식의 인공지능 방법론을 추구했다. 1970년대에는 프레임Frame, K-lines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이를 종합하여 1985년에는 <마음의 사회>​7​라는 책을 발표했다. 그는 단순한 논리적 기계를 뛰어넘어 의식, 감정, 상식을 가지는 기계에 대해 고민했고 그 결과물로서 2006년에 <감정 기계>​8​라는 책을 발표했다.

2016년에 보스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쉼 없이 탐구하고 가르쳤다. 그는 피아노를 잘 쳤는데 즉흥 연주를 즐겨했으며 음악에 인공지능을 접목하는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2001년 오디세이>​9​ 영화의 기술 자문을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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