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나 보다. 익숙하던 백색 잡음 사이로 불규칙한 소리가 느껴졌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공장의 높은 천장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로빈은 멀리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도 하루를 정리할 시간이었다.
오늘도 무사한 하루였다. 무사함이란,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직장인에게 그것은 평화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는 지루함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출고를 앞둔 컴퓨터의 기능 검사였다. 엄청난 크기의 전자식 컴퓨터는 많은 전자 부품과 전선으로 구성되었고 그만큼 불량이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어마어마한 가격표가 붙어 있는 물건에 하자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컴퓨터의 기능을 검사하기 위해서는 전용의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로빈은 이를 위해 프로그래밍 작업도 해야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약 7년 전에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가 아니었던가.
2년의 군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대학 교정은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젊음으로 가득했다. 로빈도 다르지 않았다. 수학을 전공하기 위해 입학했던 학교였지만 그는 오히려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악 연주팀과 함께 보냈다.
3학년이 되었을 때 공고문 하나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모리스 윌크스 교수가 개발한 EDSAC 컴퓨터에 관한 단기 강좌였다. 열흘짜리 프로그래밍 강좌였다. 그는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다. 이미 전자식 컴퓨터에 대한 소문은 들었던 터라 그는 이 진귀한 기계를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열흘의 강좌가 끝났을 때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란, 결국 기계어라는 명령어를 한 줄 한 줄 이어 나가는 작업이었는데 어떤 명령어를 선택할지는 오로지 작성자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수학적 절차와같이 우아한 작업은 절대 아니었다. 프로그래밍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는 다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고등학교의 임시 교사로 취직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페란티에 입사했다. 정규직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생산된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동작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종의 품질 확인 작업이었다.
페란티는 최초로 컴퓨터를 상용화한 회사였다. 아직 모든 것이 원시적인 수준이었고 컴퓨터의 동작을 검증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직접 작성해야만 했다. 로빈은 EDSAC 컴퓨터에서 기계어로 프로그래밍하던 때의 괴로움을 떠올렸다. 그는 기계어로 프로그래밍하기는 싫었다. 결국 그는, 단순하기는 하지만 컴파일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퇴근을 위해 책상을 정리한 후, 그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다. 그가 검사한 컴퓨터는 곧 어디론가 주인을 찾아 공장을 떠날 것이다. 아마 내년 이맘때도 그는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할지 모른다. 순간적으로 로빈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학교가 그리워졌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간다면 수학의 우아한 세계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듯싶었다. 사무실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문을 힘차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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