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런 뉴얼(왼쪽)과 허버트 사이먼(오른쪽)​*​

컴퓨터 과학은 경험적 학문이다… 딱 들어맞지 않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실험 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었을 듯싶다… 새롭게 만든 기계 하나하나가 실험이었다… 새롭게 작성한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실험이었다. 각각은 자연에 대한 질문이었고, 그 작동 방식 속에 해답의 단서가 들어있었다.

1975년 튜링상 수상 강연 중에서​1​

“아빠, 언제 시작해요?” 분필로 그어 놓은 동그란 원 안에 앉아 있던 바바라가 재촉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피터도 같은 눈빛으로 허버트를 바라보았다. 역시 맏이는 다른 것일까. 분필을 들고 칠판 앞에 서 있는 캐서린은 차분하게 아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의 피츠버그는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다. 오전 8시에 떠 오른 해는 오후 5시만 되면 벌써 사라졌다. 눈이나 오면 두툼한 옷과 장갑으로 무장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언덕에서 눈썰매를 타려고 거리에 나타날 뿐, 평상시는 인적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따뜻한 집 안에서 뒹굴뒹굴거리며 책을 읽거나 장난감 놀이를 하고 있어야 할 때에 카네기 기술대학의 어느 빈 강의실에 어린 삼 형제가 나와 있는 이유는 아빠를 돕기 위해서였다.

난방이 되기는 했으나 긴 겨울밤의 빈 강의실에는 한기가 있었다. 허버트 사이먼은 바바라의 재촉에 미소를 지었다. 가족을 끌고 나올 때만 해도 그는 한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빨리 검증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물론이고 이제 13살, 11살, 9살에 불과한 아이들까지 모두 끌어들인 것은 무모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삐죽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이 실험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지는 일은 자율적인 판단 없이 이루어져야만 했으므로 어릴수록 더 적합했다. 강의실에는 그의 가족 외에도 대학원생 몇 명과 앨런 뉴얼이 함께 있었다. 앨런 뉴얼은 그와 함께 오늘의 작전을 기획한 장본인이었다.

“바바라. 이제 시작할 거야. 그런데 꼭 명심해야 해. 아빠가 준 종이에 적혀 있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엄마가 신호를 주면 그 종이에 적혀 있는 대로 하면 돼. 알았지? 이건 피터도 마찬가지이고 캐서린도 마찬가지야.”

이 실험에 참여하는 이들의 손에는 종이카드가 한 장씩 쥐어져 있었다. 종이카드에는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육체적 동작을 필요로 하는 일은 아니었다. 머리를 써서 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저장 메모리’ 역할을 하는 사람은 ‘값을 저장하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그 값을 종이에 적고, ‘접근’ 요청이 들어오면 기록된 값 중 하나를 규칙에 따라 선택해서 제공했다. 각자가 맡은 일은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서브루틴’에 해당했다. 전체 흐름은 허버트의 아내가 진행했고 진행 과정에서 어떤 ‘서브루틴’이 필요하면 그 ‘서브루틴’ 종이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작업을 요청했다. 그러면 작업을 요청받은 사람은 종이카드에 적혀 있는 대로 작업을 진행한 후 그 결과를 허버트의 아내에게 알려줬다. 허버트의 아내도 역시 종이카드를 들고 있었다. 그녀도 적혀 있는 대로 진행할 뿐이었다.

과연 예상대로 잘 진행될지 허버트는 조바심이 났다. 원래는 컴퓨터에서 직접 프로그래밍을 해서 검증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카네기 기술대학에는 아직 컴퓨터가 없었다. 랜드 연구소에 있는 클리프 쇼가 그곳에 있는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기로 되어 있었지만 완성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가 앨런 뉴얼과 함께 아이디어를 완성한 것은 작년 크리스마스 때였다. 인간의 논리적 사고 방식을 컴퓨터로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앨런과 그는 인간의 사고mind 방식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마침 등장한 컴퓨터는 단순한 숫자 계산기가 아니라 인간처럼 기호symbol를 다룰 수 있는 기계였다. 두 사람은 휴리스틱heuristic이라는 방식을 사용하면 컴퓨터도 인간처럼 사고mind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과연 이 방법이 실제로 동작할까?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어 허버트는 사람을 이용해서 그의 아이디어를 검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알고리듬은 만들어졌으므로 그 알고리듬을 사람이 그대로 흉내 내면 될 일이었다. 그와 앨런은 <수학 원리 Principia Mathematica>​2​에 있는 정리들을 증명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알고리듬을 구성하는 서브루틴들을 정리한 후 이를 종이카드에 각각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간단해 보이는 수학 정리를 하나 선택했다. 이제 이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정해진 알고리듬을 따라서 그 수학 정리를 자동으로 증명할 예정이었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시작 신호를 준 허버트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런! 인간의 사고를 흉내 내는 컴퓨터 알고리듬을 검증하기 위해 그 알고리듬을 인간이 흉내 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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