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코크

지난 25년 동안 단일 프로세서 컴퓨터의 성능은 100배 증가했고 비용은 10,000배 감소했다. 나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리라 예상한다.

1987년 튜링상 수상 강연 중에서​1​

회의실에 들어선 잭은, 순간 그곳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커다란 회의실 공간의 중앙에는 짙은 고동색의 반질반질 광이 나는 거대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둘레를 검은색 가죽 의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유리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아직 해가 높아서 회의실의 절반은 그늘져 있었다. 그늘 속에 왜소한 체구의 남성이 앉아 있음을 눈치챈 것은 회의실 전체를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였다. 회의실의 절반을 강력하게 밝히는 햇빛 때문에 그늘 속의 인물이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반짝이는 눈빛은 햇빛만큼이나 강렬했다.

“존?” 그가 다가서며 말을 건네자 상대편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섰다.

“네. 존 코크입니다.”

잭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잭 버트램입니다.”

두 사람은 짧게 악수를 나누었다. 존의 맞은 편 자리로 가기 위해 잭은 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존에게서 진득한 담배 냄새를 느꼈다. 방금 전에 담배를 피고 와서인지 아니면 옷에 배어 있는 냄새인지 구분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존의 자켓 어깨 위에 묻어 있는 담뱃재를 보았다.

맞은 편 자리에 앉은 잭의 등 뒤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부셨는지 존은 살짝 눈을 찡그린 채로 잭을 응시했다.

잭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리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기존의 시스템과는 차별되는 최고 성능의 컴퓨터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혹시 회사 대표님의 메모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까?”

존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지나갔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겠는가? IBM의 대표인 토머스 왓슨 2세가 작성하는 메모가 한두 개이겠느냐마는 IBM 소속원에게 모두 알려질 만큼 유명한 메모는 ‘그 메모’ 밖에 없었다.


토머스 왓슨 2세는 컴퓨터에 진심이었다. 부친인 토머스 왓슨 1세가 제표기tabulator 사업으로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이미 그는 전자식 컴퓨터가 커다란 위협이자 기회임을 눈치챘었다. 하지만 전자식 컴퓨터 개발에서 IBM은 항상 한발 뒤졌다. ENIAC을 개발했던 에커트와 모클리가 세운 회사가 앞서가고 있었고, IBM은 기술적으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다행히 정부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컴퓨터를 생산할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고, 포트란 언어가 성공을 거두면서 일반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하지만 최고 성능의 컴퓨터는 항상 다른 회사의 몫이었다.

1956년에 IBM은 담대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IBM이 판매하던 과학계산용 컴퓨터인 704모델보다 100배 빠른 컴퓨터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IBM은 최고의 대우로 많은 인력을 뽑았고 엄청난 투자를 집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1961년에 첫 제품이 공개된 스트레치Stretch 컴퓨터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능을 보였다. 결국 가격을 40퍼센트나 할인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고 그나마도 몇 대 팔지 못하고 프로젝트를 정리했다.

그런데 1963년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네소타에 있는 콘트롤데이타Control Data Corporation라는 작은 회사에서 6600이라는 이름의 컴퓨터를 공개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였다. 바로 그다음 주인 8월 28일에 토머스 왓슨 2세는 회사의 주요 경영진에게 다음과 같은 메모를 보냈다.

지난주에 CDC는 기자회견을 갖고 6600 시스템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시스템을 개발한 연구소에는 “청소부를 포함해서” 겨우 34명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14명은 엔지니어이고, 4명은 프로그래머라고 하는데 박사 학위를 가진 이는 초급 프로그래머 단 한 명이라는군요. 외부인의 눈으로 보자면 이 연구소는 비용에 신경 쓰면서 일도 열심히 하고 아주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는 곳인 듯싶습니다.

우리의 광범위한 개발 활동을 생각해 봤을 때 나는 왜 우리가 업계 선도 자리를 잃고 남들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컴퓨터를 공급하도록 놔두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으며 이 상황을 즉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를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2​


“IBM이 컴퓨터 산업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 대표님의 생각입니다. 나는 존, 당신이 이 일에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치Stretch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해소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존은 조금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스트레치 프로젝트는 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가 IBM에 입사해서 처음으로 참여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쉬움도 많았다. 특히 그는 포트란 언어를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안타까웠었다. 미리 그 언어를 알았더라면 처음 설계할 때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음… 갑자기 그런 제안을 받아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제가 스트레치에서 했던 일은 하드웨어 시스템을 시뮬레이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시스템의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만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소프트웨어, 특히 프로그래밍 언어를 고려해야만 실제 응용프로그램을 수행했을 때 의미 있는 성능 향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존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고 잭은 조용히 그런 존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저는 하드웨어보다는 시스템 소프트웨어, 특히 컴파일러 쪽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잭은 눈을 감았다. 그는 회사 내에서 존의 평판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존과 함께 일해본 사람들이 그를 표현하는 단어는 항상 두 개였다. “괴짜”와 “천재”였다. 그는 30대 후반이었지만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오로지 일에만 빠져 있었다. 그는 항상 담배를 물고 다녔고 자신의 연구실보다는 복도를 어슬렁거리면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길 즐겨했다. 월급 수표를 주어도 이를 현금으로 바꾸지 않고 다니다가 지갑이 텅텅 비기 일쑤였고 아주 낡은 코트를 입고 외발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3,4​ 하지만 그는 항상 놀라운 해결책을 생각해 냈고, 그와 대화하다 보면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조금 지나 보면 그가 이미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음을 깨닫곤 했다.

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존. 이 일을 위해 만난 첫 번째 직원이 당신임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나는 당신이 이 일의 적임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첫 번째 후보로 놓고 이렇게 달려온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전체 시스템의 책임을 당신이 맡을 거니까요.”

존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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