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아이버슨

이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자니 아이버슨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지금까지 추운 곳에서만 살아왔던 그에게 캘리포니아의 날씨는 달콤했다. 겨울에 눈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니 이런 천국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그 대신에 잔디를 깎아야 한다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기는 했지만 추운 날 온몸을 두꺼운 옷으로 칭칭 감싸고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하지만 따뜻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안타까움보다 더 큰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 몇 개월간의 노력이 허무하게 묻혀버린 아쉬움이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만 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현장의 생생함이 그는 좋았다. 맥킨지의 샌프란시스코 지사 직원인 테드와 스탠퍼드 대학교의 밥 등과 함께 IBM 650 컴퓨터용 프로그램을 작성했던 시간은 흥미로웠고 유익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만든 프로그램이 무용지물이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6개월 전에 에이컨 교수는 그에게 6개월의 안식년을 제안했다. 말이 안식년이지 사실은 맥킨지 컨설팅 회사에 가서 일 좀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뉴욕에 본사를 둔 맥킨지가 매사추세츠의 케임브리지까지 찾아와야 했던 이유는 하와이 제당^{Hawaiian Sugar}을 위한 일 때문이었다. 하와이 제당은 물류 업체였던 맷슨 라인즈^{Matson Lines}와 운임률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와이 제당의 입장에서는 맷슨 라인즈가 청구하는 운임이 너무 높아 보였고 그래서 몇 가지 대안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싶어 했다. 예를 들어 정제 시설을 하와이에 두는 것과 미국 본토에 두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경제적인지 알고 싶어했다. 일을 맡은 맥킨지에서는 여러 대안들 사이의 비용 분석을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지만, 문제는 사내에 컴퓨터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1956년이었으므로 컴퓨터를 만져본 사람이 아주 귀했다.

전문가를 찾던 맥킨지의 발길은 하버드 대학으로 향했고 컴퓨터 기술의 선도자 중 한 명이었던 하워드 에이컨 교수에게까지 닿았다. 에이컨 교수는 당시 대학원에서 컴퓨터 관련 강의를 하던 케네스 아이버슨을 추천했다.

동부를 떠나 서부의 샌프란시스코까지 오게 된 케네스 아이버슨은 설탕 정제와 운송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IBM 650 컴퓨터를 사용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요구사항을 어떻게 알고리듬으로 기술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맥킨지의 직원인 테드는 아이버슨에게 설탕 정제와 운송에 관해 설명해주었고 아이버슨은 그가 직접 개발한 표기법을 사용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IBM 650 프로그래머였던 밥과 댄은, 아이버슨이 정리해 놓은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IBM 650 프로그램으로 변환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거의 프로젝트를 완료해 갈 무렵에 맥킨지의 경영진은 프로젝트를 중단시켰다. 고객이었던 하와이 제당 측이 더 이상 진행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와, 미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하버드 대학교 및 스탠퍼드 대학교 출신들이, 가장 최신의 기술이라고 하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뭔가 근사한 것을 만들어 내기 직전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고, 이 소문을 들은 맷슨 라인즈 경영진은 겁을 먹었다. 그래서 운임률을 재조정하기로 하와이 제당과 합의한 것이다. 하와이 제당 입장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굳이 프로젝트를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맥킨지의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에 남아 있던 짐을 정리하면서 아이버슨은 시원섭섭함을 느꼈다. 몇 개월 동안 열정을 바쳤던 프로젝트가 중도에 끝나 버려서 섭섭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훌훌 털고 원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니 개운하기도 했다.

갑자기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열매를 얻은 사람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몇 년 동안 만들어 왔던 알고리듬 표기법이 실제로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은 큰 성과였다. 스스로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었고, 그러므로 남들도 필요로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소소한 개인 물품을 담은 종이상자를 가슴에 안고 그는 사무실을 나섰다. 결국은 유익한 6개월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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