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앨런 뉴얼(Allen Newell)은 1927년 3월 19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탠퍼드 의대의 방사선과 교수였는데 후에 그는 해군에 입대했을 때 비키니 원폭 시험의 방사능 확산 연구에 참여하게 되어 아버지의 연구를 돕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삼림 감시원이 되고 싶어 했지만 17살이던 해 여름에 숭어의 먹이로 소의 간을 얼려 잘게 써는 일을 하면서 흥미를 잃어버렸다고 한다.3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고 두 가지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X선 현미경 제작 참여이다. 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폴 커크패트릭Paul Kirkpatrick을 만나게 되는데, 폴은 X선을 이용하여 현미경을 제작하는 아이디어를 막 구체화하고 있던 참이었다. 스탠퍼드 신입생이었던 앨런 뉴얼은 학부 4년 동안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 두 번째 경험은 수학자였던 조지 폴리아George Polya의 수업이었다. 뉴얼은 조지 폴리아 교수의 수업만 여섯 개를 들었다고 하는데, 조지 폴리아‡는 휴리스틱heuristic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4
스탠퍼드에서 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뉴얼은 박사과정을 미국 동부에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노엘 맥케나와 스무 살 때 결혼했는데 미국 서부에서 성장했던 두 사람은 동부를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한다.4 뉴얼은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게임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오스카 모겐스턴Oskar Morgenstern 밑에서 연구 조교 생활을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에는 존 매카시와 마빈 민스키도 있었다는 점이다. 뉴얼은 이때 두 사람과 교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후에 이 세 사람은 인공지능이라는 공통점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프린스턴에서의 생활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해의 크리스마스도 되기 전에 그는 순수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발견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제 해결사였습니다. 나는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길 원했습니다. 순수 수학자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들이 나에게는 와닿지 않았습니다.4
1년 만에 프린스턴 생활을 정리한 그는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새로 생긴 랜드 연구소RAND Corporation에 입사했다. 이곳은 미 공군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뉴얼은 수학을 조직 이론organization theory에 적용하는 시도를 했다.
1952년에 뉴얼은 세 명의 동료와 함께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방공망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서 미 공군의 조기 경보 시스템을 완전하게 시뮬레이션하는 일이었다. 심리학자였던 존 케네디, 밥 채프먼, 빌 비엘을 포함하여 네 명은 SRL(Systems Research Laboratory)이라는 연구실을 만들었다. 이 연구실은 후에 SAGE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최초의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라고 할 수 있는 Systems Development Corporation으로 분사되었다.5
네 명 중에서 그나마 기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던 뉴얼이 공군 레이더 표시기 시뮬레이션 제작일을 맡게 되었다. 즉, 가짜로 공군 레이더 화면에 적군 및 아군의 비행기가 나타나도록 흉내 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시뮬레이션 방법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그는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오후에 그의 운명을 바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은 내가 27살이던 해의 금요일 오후에 벌어졌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나지만 11월 중순 경이었습니다. 올리버 셀프릿지Oliver Selfridge라는 분이 랜드 연구소를 방문했습니다… 훨윈드 컴퓨터의 메모리를 테스트하는 컴퓨터를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패턴을 인식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세미나에 참석한 이는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고 두세 시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나에게 그것은 완전히 인생이 바뀌는 경험이었습니다. 그 세미나가 끝났을 때 나는 컴퓨터가 뭐든 복잡한 처리를 할 수 있는 기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3
당시 컴퓨터는 숫자를 계산하는 기계로만 인식되었다. 하지만 셀프릿지의 세미나를 통해서 뉴얼은 컴퓨터가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시스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던 클리프 쇼Cliff Shaw를 찾아갔고 당시 랜드 연구소에 있던 아주 초보적인 컴퓨터를 사용하여 가짜 레이더 화면을 만들어냈다. 프린터로 출력된 형태이기는 했으나 이 가짜 레이더 화면은 그럴듯했다.
허버트 알렉산더 사이먼(Herbert Alexander Simon)은 1916년 6월 15일에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아서 사이먼은 독일에서 이민 온 전기 엔지니어로서 발명가이자 변리사였다. 어려서 과학을 좋아했던 그는 경제학과 심리학에도 관심을 가졌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토론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33년에 시카고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사회과학과 수학을 전공하다가 점차 정치과학과 경제학으로 관심이 바뀌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정치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문과생이었지만 자동 계산 기계를 일찍 접했다. 박사 과정이었던 1936년경에 그는 어떤 책자에 들어갈 커다란 통계 표를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나는 시카고 대학교 출판국에서 IBM의 구형 제표 기계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펀치카드를 통해 데이터를 입력받았고, 특정 열column의 값들을 쭉 더하거나 간단한 산술연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통계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그 기계의 작동법을 배웠습니다. 기계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어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6
그는 1940년에도 대형 통계 작업을 위해 제표 기계를 사용했다.
1943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던 그는 이미 1942년부터 일리노이 기술 대학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정치과학과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에 카네기 기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01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산업관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경영 관리뿐만 아니라 심리학, 컴퓨터 과학 등을 가르쳤다.
강의와 연구 외에 그는 활발하게 자문 활동을 벌였다. 그가 자문을 제공하던 곳 중 하나가 랜드 연구소였다. 그는 그곳의 연구원들이 방공 시스템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여 비행기 이동 상황 지도를 컴퓨터로 출력한 것을 보았다. 그는 컴퓨터가 산술 연산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기호symbol을 처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6
랜드 연구소에서 연구원과 자문 위원으로 처음 만나게 된 앨런 뉴얼과 허버트 사이먼은 이후 약 40년 동안 든든한 연구 동반자로 함께 했다. 조기 경보 시스템을 시뮬레이션하는 과정에서 컴퓨터의 잠재력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조직 운영organizational에서 인간의 사고human mind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우리는 조직적 맥락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조직적 문제에서 개인의 문제로 관심이 바뀌었습니다.7
1955년 2월에 앨런 가족은 피츠버그로 이사를 했다. 앨런이 카네기 기술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도교수는 허버트 사이먼이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모양이었을 뿐 허버트는 앨런을 동등한 연구자로 대해주었다. 랜드 연구소는 앨런을 여전히 직원으로 유지해주었고,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클리프 쇼와 함께 인간의 사고mind를 분석하고 모델링하기 시작했다. 앨런은 미친 듯이 연구에 몰입했다. 그는 밤 8시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나는 회의를 선호했고, “급한 일”이 생겼을 때는 이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고 한다.4 앨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55년 말에 앨런, 허버트, 쇼는 자동으로 수학 정리를 증명하는 프로그램인 로직 시어리스트Logic Theorist의 알고리듬을 완성했다.
그 가을에 우리는 세 가지 작업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체스 프로그램부터 시작하는 것이었고 기하학도 해 볼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지각perceptual과 관련되어서 다루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logic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마침 집에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 책 두 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수학 정리를 증명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인간이 휴리스틱을 사용해서 어떻게 다음 단계로 할 일을 제대로 찾아내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확실하게 나의 주된 관심은, 무한히 뒤지지 않고도 올바른 수학 정리를 찾아내는 휴리스틱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8
1955년 크리스마스 연휴에 알고리듬의 동작을 수작업으로 검증한 후에 앨런과 허버트는 허버트의 가족과 대학원생을 동원하여 알고리듬을 다시 시뮬레이션해 보았다.9 알고리듬은 예상대로 동작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이들은 엄청난 결과물을 쏟아냈다. 먼저 클리프 쇼는 랜드 연구소에 있던 전자식 컴퓨터 조니악Jonniac에서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로직 시어리스트가 동작함을 보여줬다.# 로직 시어리스트 프로그램은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의 2장에 나오는 수학 정리 52개 중 38개를 증명해내었고 어떤 것은 오히려 더 나은 방식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증명된 정리의 절반은 1분 안에 결과가 나왔고, 대부분이 5분 안에 증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10
로직 시어리스트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 이들은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인 IPL(Information Processing Language)도 개발했다. 1956년이면 아직 포트란 언어도 정식 발표되기 전이었다. 로직 시어리스트는 기본적으로 트리구조tree structure의 자료를 뒤지는search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들이 동적으로 생성되고 사라진다. 따라서 앨런과 쇼는 리스트list라는 동적 자료구조 모델을 생각해냈고 동적 메모리 관리와 재귀적 호출recursion 등을 언어에 추가했다. IPL은 후에 존 매카시의 리스프Lisp 언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이 알고리듬은 계층화된 서브루틴 방식으로 되어 있었다.
로직 시어리스트 프로그램은 최초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앨런과 허버트는 이 성과를 바탕으로, 보다 진보된 개념의 프로그램인 GPS(General Problem Solver)를 1957년에 내놓았다. 로직 시어리스트는 논리수학에 초점을 두고 만들었던 것에 반하여 GPS는 보다 다양한 문제를 풀어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58년에는 체스 프로그램이 발표되었다. NSS(Newell-Shaw-Simon)라는 이름의 이 프로그램은 그리 인상적인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실제로 10살 아이와의 시합에서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4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휴리스틱을 사용한 인공지능 응용 프로그램이었고 후에 발표되는 많은 체스 프로그램에 영감을 주었다.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 계기는 1956년에 열린 다트머스 워크샵이다. 존 매카시와 마빈 민스키의 주도로 열린 이 행사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 행사에 참석했던 이들이 후에 인공지능 연구의 핵심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11
다트머스 워크샵에 등장한 로직 시어리스트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당시 워크샵에 참가한 이들은, 열정은 있었지만 사실 뭔가 보여줄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혜성같이 등장한 로직 시어리스트는 정말로 돌아가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었다.
다트머스에서의 발표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뭔가를 해낸 사람이라는 생각도 조금은 있고 해서 상당히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다트머스 학술대회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사실 허버트와 나는 우리가 하려는 일에 파묻혀 있었을 뿐, 이것이 어떤 분야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그렇게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로직 시어리스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적고 있었습니다. 허버트의 분야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허버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와우! 축하합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돌파구처럼 보입니다.”7
로직 시어리스트의 성공은 기호symbol를 다루는 인공지능 방법론이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로직 시어리스트, IPL, GPS, NSS 등의 성과물을 잇달아 발표한 앨런과 허버트는 1972년에 <Human Problem Solving>12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그간의 연구 결과를 정리한 후, 점차 독자적인 관심사를 추구하면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허버트 사이먼은 에드워드 파이겐바움Edward Feigenbaum과 함께 EPAM(Elementary Perceiver and Memorizer)이론을 개발해서 학습 연구에 기여했고,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분야에서 끊임없이 활동했다. 그는 조직에서의 의사 결정decision-making에 관한 연구로 1978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복부에 생긴 종양 제거 후 후유증으로 2001년 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앨런 뉴얼은 정통 컴퓨터 과학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고든 벨Gorden Bell과 함께 PMS, ISP라는 표기법을 개발하여 컴퓨터 구조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길을 열었다. 또한, 고든 벨, 빌 울프Bill Wulf 등과 함께 다중처리 컴퓨터 C.mmp를 성공적으로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70년대 전반기에는 음성 인식 시스템 분야에서 활동했고 DARPA의 특별 위원회를 이끌기도 했으며, 1970년대 후반기에는 제록스 PARC 연구소와 함께 컴퓨터와 인간 사이의 상호 작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HCI(Human-Computer Interaction)라는 분야의 문을 열었다.
1980년대에 뉴얼은 다시 인공지능 분야로 돌아왔다. 그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개의 검색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고민했고 소어Soar라는 시스템으로 가능성을 시험했다. 1988년에 전립선암 진단을 받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어 프로젝트에 에너지를 쏟았다고 한다. 병상에서도 쉬지 않고 연구에 전념하던 그는 1992년 7월 19일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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