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익스트라는 노크를 하기 위해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베인하든 박사의 연구실 방문 앞에서 그는 주저했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갈등이 생겼다. 그에게는 심각한 고민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일 수도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물리학자가 될 생각이었다. 아버지도 그를 지지했다. 고등학교 교사이자 네덜란드 화학 학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아버지는 그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접해보라고 권유했다. 컴퓨터에 일찍 익숙해지면 남들보다 더 빨리 뛰어난 물리학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2 영어가 능숙하지 못했지만 영국 케임브리지에서의 1년은 너무도 좋았다. 그는 컴퓨터가 신기했고 프로그래밍이 재미있었다.
영국에서 돌아온 다익스트라는 학생 주임교수의 소개로 암스테르담 수학 센터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최초의 공식적인 ‘프로그래머’였다.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파트타임으로 틈틈이 일했다. 그가 명령어 구조를 설계한 컴퓨터가 만들어졌고 그 컴퓨터를 위한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다익스트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론물리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사그라들었고 프로그래밍이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프로그래밍이 주는 지적인 자극이 이론물리보다 더 강했다. 그렇지만 과연 프로그래밍에 인생을 걸어도 괜찮을지, 미래에도 프로그래밍이 의미 있는 영역으로 남아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대학생에 불과한 다익스트라에게 너무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베인하든 박사의 연구실을 찾아왔다.
“똑 똑 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박사님.”
문을 열고 들어온 다익스트라에게 베인하든 박사는 함박웃음을 보였다.
“어. 에드스거. 예고도 없이 웬일이지? 여기에 앉게.”
그는 책상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인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친 다익스트라는 그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박사님. 저는 프로그래밍이 좋습니다. 프로그래밍을 할 때면 항상 지적인 흥분을 느끼고 성취감을 얻습니다. 단순히 0과 1로 구성되어 있지만 조금이라도 오류가 있으면 바로 결과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용서가 없는 점’이 특히나 저를 자극합니다.2
그런데 문제는, 프로그래밍이 뭔가 지적이라고 인정받을만한 학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하드웨어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습니다. ‘너는 전문적 경쟁력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그들은 진공관, 증폭기 등을 거론하면서 뭔가 말하지만 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과학자의 삶을 꿈꿔왔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래머의 길을 선택하면 과학의 세계에서는 발을 떼야 할 것 같습니다. 과학을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면 프로그래밍을 포기해야 할까요?”
말을 마친 다익스트라는 베인하든 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까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웃음을 띠고 있던 그는 어느새 진지해진 모습이었다.
“자네에게 그런 고민이 있었구먼. 음, 먼저 말하고 싶은 게 있네. 컴퓨터는 그저 반짝 유행을 끌다 지나갈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 곁에 있을 거야. 물론 자네가 우려하는 바와 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는 분명한 과학적 요소가 없어 보이기는 해. 하지만 이제 그것을 과학으로 정립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나는 자네가 그중 한 명이라고 확신한다네.”
베인하든의 말은 다익스트라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프로그래밍의 시대는 이제야 시작되지 않았는가. 이 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학문으로 만들 책임이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그의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베인하든 박사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다익스트라가 가졌던 불안과 의심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도전과 희망이 자리 잡았다.
다익스트라는 베인하든 박사에게 감사를 표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1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