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에드워드 파이겐바움(Edward Albert Feigenbaum)은 1936년 1월 20일에 미국 뉴저지주의 위호큰Weehawken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드Ed‘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갓난아이 때에 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그는 양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회계사였던 양아버지는 기계식 계산기였던 먼로Monroe 계산기를 직접 구매해서 사용했다. 꼬마 시절부터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 잡지를 읽던 그였으므로 그 계산기에 큰 흥미를 가졌다.
나는 그 계산기에 완전히 빠졌고 훌륭한 기능을 갖춘 그 기계의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내 친구들은 테니스 팀 대표로 뽑히거나 농구팀에 뽑혔습니다만, 그런 건 내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 계산기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계산기 쓰는 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무거운 녀석을 끌고 버스를 타서 학교에 갔습니다. 3
그는 나이에 비해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여주었고 두 번이나 월반했다. 그의 양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면 그를 데리고 과학 박물관과 천문대를 자주 방문했고 어린 파이겐바움은 과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갔다.
1952년에 그는 장학생으로 카네기 기술 대학Carnegie Institute of Technogy에 진학했다. 그는 순수과학이 아닌 전기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부분적인 이유로는 당시 중산층의 문화를 들 수 있겠습니다.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내 주위의 누구도 물리학자와 같은 일자리가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카네기 기술 대학을 선택한 것은 정말로 멋진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허버트 사이먼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앨런 뉴얼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앨런 펄리스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결정은 완전히 운이었습니다. 순전히 그들이 장학금을 주겠다는 선전을 했기 때문이었고, 아무도 내게 MIT라는 학교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3
에드가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허버트 사이먼 덕분이었다. 1955년 크리스마스 방학을 끝내고 다시 교실에 모인 학생들 앞에서 허버트 사이먼은 자신이 크리스마스 방학 중에 앨런 뉴얼과 함께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를 발명했다고 말하고는 IBM 701 컴퓨터 사용설명서를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에드는 집에 돌아가서 그 사용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밤새워 읽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거기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3
실제 프로그래밍은 IBM에서 여름 인턴을 하면서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여름에 IBM 본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는데 회사에서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가 도입할 예정이던 650 컴퓨터를 미리 배우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기간에 그는 포트란 언어를 개발 중이던 존 배커스를 만나기도 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허버트 사이먼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IBM 인턴을 마치고 학교에 등교한 그에게 허버트 사이먼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수업을 듣지 않을 걸세. 우리 대학원은 연구를 하는 과정이야. 여기에 문제가 있으니 한 번 생각해 봐. 사람들은 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걸까? 그 작업에 깔려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두세 개의 원리들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3
이 화두에 대한 결과물이 EPAM(Elementary Perceiver and Memorizer)이다. EPAM은 컴퓨터를 이용한 학습을, 최초로 시연한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4
EPAM을 완성한 그는 1959년에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미국을 떠나 영국을 방문했다. 풀브라이트 재단의 지원을 받아 국립물리연구소NPL에서 지내면서 그는 앨런 튜링이 설계한 Pilot ACE가 제작되는 현상을 목격하기도 했고, 영국의 인공지능 연구자들과 교류했다. 하지만 나름 영국의 컴퓨터 연구에 기대를 가지고 방문했던 그에게 마주친 현실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NPL에 갔을 때, 나는 (이미 미국에서) 709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을 했었고, 프린터나 카드 천공기 관련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비치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구식의 이진 정정 방식 천공 카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글자를 하나 표현하기 위해서 구멍을 두 개 뚫어야 했는데, 일단 카드에 첫 번째 구멍을 뚫고 그 카드를 움직인 다음에 구멍을 뚫은 후 다시 카드를 움직여야 했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미 1959년이었다구요!3
1960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에드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컴퓨터 과학과가 정식으로 생기기 전이었다. 조직 이론과 인공지능 이론을 동시에 다루던 그는 1965년에 스탠퍼드의 컴퓨터 과학과로 자리를 옮긴다. 컴퓨터를 이용한 연구에 집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데이터”에서 이론을 뽑아내는 귀납induction적 방법론에 눈길을 돌렸다. 당시의 인공지능 연구는 “수학적” 추론inference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많은 “데이터”들 속에서 규칙을 끌어낼 수 있고 그 규칙은 새로운 데이터를 예측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분자생물학자 조슈아 레더버그와 함께 DENDRAL이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복잡한 화학물질의 기하학적 구조를 추정하기 위해서 그 물질의 화학식과 분광 정보를 사용했다. 화학 전문가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측정 데이터를 사용하여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 규칙을 통해서 새로운 화학물질을 예측해 낼 수 있었다.
DENDRAL의 성공에 힘입어 그는 의약 관련 시스템인 MYCIN, 분자 유전학 관련 시스템인 MOLGEN, X-선 결정학 관련 시스템인 CHRYSALIS 등을 개발했다. 그는 전문가의 지식knowledge을 인공지능 분야에 도입했고 ‘전문가 시스템Expert system‘이라는 인공지능의 영역을 개척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미 국방부의 의뢰를 받아서 비밀 프로젝트를 했는데, 바닷속에서 잠수함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음파탐지기로부터 수집된 데이터로부터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내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라지 레디 교수가 발표한 칠판 모형blackboard model 을 채택하여 성공적으로 시스템을 구현해 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로서 그는 많은 유명한 제자들을 길러냈고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세 개의 회사를 창업할 정도로 산업계에서도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그는 여전히 인공지능 분야의 여러 회사에 자문을 해주고 있다.
라지 레디(Dabbala Rajagopal Reddy)는 1937년 6월 13일에 인도 안드라 프라데시의 카투르Katoor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지Raj‘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는 자영농이어서 그 근방에서는 부유한 축에 속했지만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곳은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다.
그곳에는 전기도 없었고 수도도 없었습니다. 우리 중에 신발을 가진 이는 드물었습니다. 나도 16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샌들이나 신발을 신었습니다.5
일곱 남매 중 넷째였던 그는 아홉 살이 되던 때에 학교를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나 하숙했다. 집 근처에는 초등학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학을 좋아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마드라스Madras에 있는 긴디 공과 대학Guindy College of Engineering에서 토목 공학을 전공했다. 1958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영연방 국가 간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인도와 호주 사이에 교환학생을 상호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선발된 것이다. 다른 두 명의 학생과 함께 멜버른 대학교에 온 그는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자 호주에서 대학원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1959년에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토목공학 대학원에 입학한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의 대학원 지도교수 두 명이, 자칭 토목공학 분야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사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낮에 그들이 프로그래밍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밤에 그대로 따라해 보는 식으로 프로그래밍을 독학했고 그러다가 그들의 프로그래밍 보조원이 되었다.5 그들이 사용한 컴퓨터는 영국의 English Electric사에서 제작한 DEUCE Mark II였다. 수은지연선을 메모리로 사용하는 아주 구식컴퓨터였다.
1년 만에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이미 컴퓨터에 푹 빠져 버린 상태였다. 그는 IBM에 입사지원서를 냈고 채용되었다. 그는 현장 기술 지원자로 일했다. 그가 맡은 일은, IBM의 컴퓨터를 구매한 기업 고객이 겪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 주고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논문집을 읽다가 인공지능에 관한 논문을 접하게 된다.
이런, 이게 정말 가능하다는 건가? 이게 사실이라면 이 일에 꼭 껴야지.5
그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에 지원서를 냈고 스탠퍼드 대학교에 바로 합격했다. 1963년에 미국 땅을 밟은 그는 스탠퍼드 수학과 대학원에 입학했고 마침 부임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젊은 교수를 논문지도 교수로 두게 되었다. 그 교수는 존 매카시였다.
매카시 교수는 지도 학생들에게 몇 가지 연구 주제들을 제안했는데 그중 하나가 음성을 디지털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컴퓨터가 한 대 있다네. 그것은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기A-to-D converter를 가지고 있어서 음성을 디지털 정보로 바꿀 수 있어. 여러분 중 한 명은 음성 인식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말을 듣고 라지는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당시에 매카시 교수는 DEC이 제작한 최초의 PDP-1 컴퓨터 중 한 대를 확보해서 시분할 시스템 개발에 사용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마음대로 사용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므로 라지는 밤에 일하는 올빼미가 되었다. 그는 저녁에 출근해서 밤 여섯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마음껏 사용했다.5
1966년에 라지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의 신생 학과인 컴퓨터 과학과의 첫 박사 학위자였다. 그는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조교수에 채용되었지만 정년을 보장받는 자리는 아니었다. 스탠퍼드 대학교는 본교 출신을 정년 보장 교수로 채용하지 않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파이겐바움 교수의 소개로 카네기 멜런 대학교의 컴퓨터 과학과와 접촉했고 1969년에 조교수로 채용되었다.
그는 음성 인식 시스템 연구에 전념했다. 카네기 멜런 대학교에서 그는 DARPA의 자금 지원을 받아 Hearsay, Harpy라는 음성 인식 시스템을 개발했다. DARPA가 지원한 다른 연구 기관의 결과물과 비교했을 때 Hearsay와 Harpy는 충분한 정확도를 확보하면서도 무려 10만 배나 더 빨랐다. 휴리스틱 기법과 효율적인 검색 기법을 고안했기 때문이었다. 라지의 연구팀은 음성 인식 분야에서 독보적인 연구 성과를 잇달아 발표했고, 그 결과물들은 현대의 상용 제품들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라지는 “칠판 모형blackboard model“이라는 방법론을 제안했다. 이것은 여러 참여자들이 지식을 함께 다듬어 나가서 해답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1979년에 라지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 내에 로보틱스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일본이 로봇 시장에서 빠르게 치고 나오는 데 경계심을 품은 미국 정부는 카네기 멜런 대학에 큰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동시에 웨스팅하우스 사를 포함한 몇몇 기업에서도 연구비를 지원했다. 현재 카네기 멜런의 로보틱스 연구소는 세계적인 로봇 연구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라지는 학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벌여 왔으며 고향인 인도에서도 젊은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에서 석좌교수로 활동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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