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검고 아득했다. 윌크스는 조금 현기증을 느꼈다. 대서양을 훑고 지나온 바람이 그의 뺨을 두들기며 지나갔다.
전쟁이 끝난 지 일 년이 지났다. 검고 아득한 저 밑바닥에는 독일의 유-보트가 발사한 어뢰를 맞고 가라앉은 배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는 바다가 그는 소름 끼쳤다.
이번 여행은 너무 급작스러웠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초대장이 날아왔다. 초대한 쪽에서는 아마도 대서양만 건너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세상은 전쟁에서 온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국이 얼마나 피폐되었는지 미국 친구들은 모르고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거대한 컴퓨터를 만들었다. 전쟁에 제대로 기여하기에는 조금 늦게 완성되었지만 그 기계가 보여준 잠재력은 이미 유럽에도 알려진 상태였다. 바로 그 컴퓨터를 만든 주역들이 그를 초대했다. 여름에 특별하게 진행되는 강좌에 그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는 처음에 의아했다.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계산 관련 연구소 일을 맡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전쟁 중에 레이더 관련 일을 했고 디지털 회로와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ENIAC이 만들어지고나서 처음으로 외부인을 초청하는 행사였고 그것도 전 세계에서 단 28명만 초대되었다는 것 아닌가.
늦게 도착해서 강좌의 앞 부분은 듣지 못했지만 다행히 그는 내용을 쫓아갈 수 있었다. 그간 틈틈히 관련 정보를 열심히 챙겼던 덕분이었다. ENIAC은 매우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기계식 장치에 의존하던 대규모 계산을 전자식 회로로 대체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정작 그를 사로잡은 것은 ENIAC이 아니었다. ENIAC의 설계자였던 모클리와 에커트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다름 아닌 저장형 프로그램이라는 방식이었다. 메모리에 프로그램을 로딩하여 실행하는 방식은 컴퓨터의 활용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윌크스는 경쟁에서 뒤지고 싶지 않았다.
바다는 잠잠했지만 윌크스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선실에 두고 온 가방 속에는 그가 급하게 정리해 놓은 여러 아이디어들이 들어 있었다. 빨리 그 아이디어들을 구체화시키고 싶은 마음에 그는 조바심이 나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이 따가왔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멀리 영국 쪽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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