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넌 교수님. 오셨습니까?”
서덜랜드는 반갑게 인사했다. 섀넌 교수도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형광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힌 방은 비좁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러이 보이는 계기판들이 사방의 벽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장 끝까지 숨 막힐 듯 꽉 채운 이 계기판들은 사실 하나의 기계였다. 링컨 연구소가 개발한 TX-2 컴퓨터였다.
“그동안 작업한 걸 보여줄 준비는 되었나?”
섀넌 교수는 서덜랜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운을 띄웠다. 그가 오늘 TX-2 컴퓨터실을 방문한 이유는 서덜랜드의 박사 논문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박사 논문 지도교수인 그는 그동안 구두로만 상황을 전해 들어왔다. 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넵.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모니터 브라운관 앞에 앉아 있던 서덜랜드는 만년필 같은 것을 손에 쥐었다. 만년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해 보였다. 촉이 없는 만년필이라고 해야 어울릴 듯싶었다.
“제가 손에 쥔 것은 라이트펜입니다. 이것으로 이제 모니터 위에 선을 그려보겠습니다.”
서덜랜드가 라이트펜을 모니터 화면에 가까이 가져가자 바로 그 위치에 십자가 형상이 나타났다.
“이렇게 선의 시작점 위치에 펜을 가져간 후에, 제 왼편에 있는 버튼들 중에서 ‘그리기’라는 버튼을 누르면 선 그리기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하자 화면에 점이 찍히는가 싶더니 그가 라이트펜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펜 끝을 따라서 직선이 마치 고무줄이 움직이듯 따라다녔다.
“이제 선의 끝점 위치에 펜을 가져가고 거기서 펜을 화면으로부터 확 떼어버리면 직선이 고정됩니다. 만약 다각형을 그리고 싶다면 꼭짓점 자리에 펜을 위치시키고 ‘그리기’ 버튼을 누르면 현재 만들어진 직선은 고정되고 새롭게 새로운 직선이 시작됩니다.”
서덜랜드는 직선을 이어 나갔고 화면에는 육각형의 도형이 그려졌다. 섀넌 교수는 조용히 시연을 지켜보았다.
TX-2 컴퓨터는 놀라운 기계였다. 당시까지 개발되었던 컴퓨터와는 사뭇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모니터와 라이트펜이었다.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접할 수 있는 컴퓨터들은 대부분 많은 스위치와 전구들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과를 출력하기 위해서는 펀치 카드나 펀치 테이프를 사용해야 했다.
TX-2가 이렇듯 달랐던 이유는 설계자였던 웨스 클라크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컴퓨터와의 상호 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침, MIT 링컨 연구소는 공군이 의뢰한 방공air defence 시스템용 컴퓨터를 위해, 비행 물체의 접근을 시각화하기 위한 모니터 장치와, 상황을 표기하기 위한 입력장치인 라이트펜을 도입한 상태였다. 그래서 공군이 순전히 트랜지스터라는 새로운 전자부품의 테스트를 위해 컴퓨터 시스템 개발을 추가 의뢰했을 때 클라크는 주저 없이 모니터와 라이트펜을 포함했다.
그런데 막상 이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제대로 사용할 방법을 아는 이는 없었다. TX-2가 완성된 것은 1958년이었지만 1960년 여름에 허셜 루미스가 회전 손잡이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까지 모니터와 라이트펜은 그저 흥밋거리에 머물러 있었다.2 회전 손잡이를 이용한 그림 그리기는 너무 불편했다.
1961년 4월에 서덜랜드는 웨스 클라크를 찾아갔다.
“당신의 컴퓨터를 사용하고 싶습니다.”3
박사 과정 대학원생이던 서덜랜드보다 10살 많았던 웨스 클라크는 파이프 담배를 뻐끔 피우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가요? 나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웨스 클라크는 다시 담배를 뻐끔 피우고 말했다.
“아니.”
순간 서덜랜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 젠장. 이제 내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네요.”
그러자 웨스 클라크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구. 지금 바로 써도 돼.”
섀넌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모니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서덜랜드는 조금 긴장되었다. 박사 학위 논문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드는 순간 섀넌 교수가 입을 열었다.
“아주 훌륭하네. 서덜랜드 군.”
서덜랜드는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원 그리기가 들어가야 할 것 같군.”
원? 갑자기 서덜랜드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진입한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선 그리기에만 집중했던 터라 원을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서덜랜드 군. 연필하고 종이를 좀 주겠나? 내가 그려보고 싶은 그림이 있는데 …”
서덜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떨어진 책상 위에 종이가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의자를 뒤로 밀고 그는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그의 머릿속은 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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