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젊은 시절의 아이번 서덜랜드

아이번 서덜랜드(Ivan Edward Sutherland)는 1938년 5월 16일에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해스팅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뉴질랜드 사람이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 차출되어 유럽의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뉴질랜드 정부는 현지에서 군대를 해산하면서 흥미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유럽에서 일정 시간을 보낸 후에 귀국하면 귀국편 여비를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부친은 런던 대학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토목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모친은 영국 사람이었는데 희한하게도 두 사람은 프랑스에서 만났고 뉴질랜드에서 결혼한 후에 미국으로 이민 왔다.​3​

많은 튜링상 수상자들과는 달리 아이번 서덜랜드는 학교 공부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하며 성장한 후에도 맞춤법을 잘 틀리는 것으로 유명했다.​3​ 하지만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뭔가 직접 만들어 보기를 좋아했다. 후에 역시 유명한 컴퓨터 과학자가 되는 형, 버트 서덜랜드와 함께 무선 아마추어 통신에 심취했으며 고등학교 때인 1953년에는 직접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가 최초로 작성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그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토목공학 박사인 부친은 미국에 있는 댐을 직접 찾아다니길 즐겼다고 한다. 그는 가족 여행이라는 미명(?) 하에 가족을 데리고 댐을 방문했으며 두 아들에게 댐의 내부를 구경시켜 주고 설명해 주었다. 서덜랜드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때에 그의 부친은 당시로는 거금인 50달러를 들여서 컴퓨터를 사서 집에 들여놓았다. 스페리Sperry P4라는 이름의 컴퓨터였는데, 폭격기에 장착하는 전기-기계식 계산기였다. 무게가 무려 100킬로그램이나 되는데 잠망경이 달려 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집에 설치하려니 이 잠망경 때문에 매우 곤란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부엌에 설치했습니다. 그것은 위로 솟아난 잠망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래쪽에 잠망경이 하나 더 있었는데 길이가 1미터 80이나 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조립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조립이 되어 있더군요… 마룻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잠망경은 지하실까지 내려가 있었습니다.​3​

그의 모친도 남편 못지않았다. 두 아들이 뭔가를 만들려는 데 구하기 힘든 부품 때문에 어려움에 부닥치면 직접 해결해 주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전화 회사는 독점 회사였습니다. 그래서 전화기 부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죠. 나와 형은 덧셈 기계를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전화기 다이얼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저희에게 전화기 다이얼을 넘겨주시더군요. 어떻게 구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3​

심지어는 트랜지스터가 처음 발명되고 나서 아직 일반인들이 트랜지스터를 직접 접하기 어렵던 시절에 그녀는 벨 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몇 개 구해서 아들에게 전달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3​

이제 서덜랜드의 인생에 그의 어머니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에드먼드 버클리Edmund Berkeley와의 만남이다. 그녀는 ‘일반 의미론general semantics‘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분야였다. 일반 의미론 학회는 정기적으로 학술대회를 열었고 그녀는 여기에 참가하기를 즐겼는데 그곳에서 에드먼드 버클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수학을 전공한 후에 보험회사에서 일하다가 후에 컴퓨터 분야에 뛰어든 사람으로 미국 컴퓨터 학회(ACM)를 창설한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통해서 서덜랜드는 에드먼드를 알게 되었다. 에드먼드는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면서 사이먼Simon이라는 작은 컴퓨터를 개발했다. 이 컴퓨터는 릴레이relay로 만든 전기-기계식 컴퓨터였는데 크기가 서류가방 만 했으며 2비트 값 6개를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를 가졌다. 고등학생이던 서덜랜드는 나눗셈하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는데 에드먼드가 발표한 책 <거대한 뇌>​4​에 소개되었다.

에드먼드와의 만남은 클로드 섀넌으로 이어졌다. 에드먼드는 당시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클로드 섀넌에게 똘똘한 고등학생 둘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고 만남을 주선했다. 아마도 클로드 섀넌이 흔쾌히 동의한 듯싶은데, 문제는 벨연구소까지 가려면 누군가 자동차로 서덜랜드 형제를 태워주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운전을 끔찍이 싫어했지만 두 아들을 위해서 결국 자동차 운전대를 잡았다. 클로드 섀넌과의 만남은 후에 그가 MIT 박사 과정에 입학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5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덜랜드는 전액 장학금으로 카네기 기술 대학(현재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의 전기 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전기공학과 학과장은 그를 불렀고, 서류전형비를 지원할 터이니 좋은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내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과 MIT를 저울질했는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선택했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그녀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그녀와 결혼했습니다. 나에게 대학원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장모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느냐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택한 이유입니다.​3​

그는 일 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디지털 컴퓨팅에 관심이 많았지만 미국 서부는 동부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다. 학기 중에 MIT의 마빈 민스키 교수와 올리버 셀프릿지 교수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방문해서 학생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고 MIT 링컨 연구소에서 만든 TX-0 컴퓨터를 소개했다. 그곳에서는 학생들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에 서덜랜드는 MIT 박사과정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클로드 섀넌이 MIT로 옮겼음을 알았고 그에게 방문하고 싶다는 편지를 썼다. 클로드 섀넌은 자기 집으로 오라는 따뜻한 답장을 보냈고 당시 임신 8개월이던 아내와 함께 매사추세츠로 날아간 서덜랜드는 환대를 받았다.


서덜랜드는 MIT 링컨 연구소에 있던 TX-2를 이용하여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인 스케치패드Sketchpad를 만들었다. 스케치패드가 컴퓨터를 이용한 최초의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케치패드가 항상 제일 먼저 거론되는 이유는, 현재의 컴퓨터 그래픽스 프로그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는 1963년의 스케치패드 시연 영상​5​을 보면, 사용하는 도구의 형태만 다를 뿐 선을 그리고 원을 그리는 방식이 오늘날의 컴퓨터 그래픽스 소프트웨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내부에서 그림 정보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도 이후의 소프트웨어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3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곧바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원래 그는 학부 시절에 육군 학군사관(ROTC)에 지원했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었고 청년들은 징집되었다. 그는 어차피 군대에 가게 될 거라면 장교로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 육군에서는 그가 공부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중위 계급장을 달고 그는 미시간 입실란티 공항으로 배치되었다. 그곳에서는 미시간 대학교가 레이저나 레이더 같은 기술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학교와 육군 사이의 소통을 담당했던 그는 얼마 후 미국 국가 안보국(NSA)으로 전출되었고 그곳에서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했다. 6개월 후 그는 국방부의 부름을 다시 받았고 이번에는 ARPA라는 조직에 배치되었다. IPTO라는 부서의 관리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다.

내 생각에는 그 자리에 맞을 만한 사람들이 모두 손사래를 쳤던 듯합니다. 그 자리는 공무원 자리였고 그래서 민간에 비해서 보수가 크게 낮았습니다. 그리고 이해관계 충돌conflict of interest 문제도 있었겠죠…. 후보자 목록에서 45명이나 거절했고 결국 나한테까지 온 거였습니다. 나는 육군 소속이었고 명령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사실 나도 거절했어야 옳았습니다. 나는 그게 그렇게 큰일을 하는 자리인 줄은 몰랐습니다.​3​

그는 릭라이더J.C.R. Licklider의 후임으로 IPTO를 맡았다. 전임자인 릭라이더는 미국에 있는 유수의 대학교 컴퓨터 연구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도 자율성을 보장한 상태였다. 따라서 서덜랜드는 전임자가 만들어 놓은 기조를 유지했다. 약 일 년의 재임 기간 중에 그는 ILLIAC V 프로젝트의 시작을 지원했다. 이 기간에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있는 데이비드 에반스를 알게 되었고 이는 후에 더 큰 인연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가 26살의 육군 중위 신분으로 IPTO를 맡았을 때 그를 보좌할 직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너무 어리고 직급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그를 보좌할 민간인을 뽑았는데 그가 바로 밥 테일러Bob Taylor이다. 서덜랜드가 IPTO를 떠났을 때 밥 테일러가 그의 뒤를 이었고 ARPAnet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군에서 2년을 보냈을 때 서덜랜드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좋은 제안을 받았다. 종신을 보장하는 교수 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1965년에 군복을 벗고 그는 전기공학과 조교수로서 하버드 대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1967년에 그는 학생이던 데니 코헨Danny Cohen과 함께 선 자르기line-clipping 알고리듬을 발표했고, 1968년에는 학생이던 밥 스프라울Bob Sproull과 함께 세계 최초의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개발했다.

1968년에 그는 돌연 유타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ARPA 시절에 알게 되었던 데이비드 에반스가 유타 대학교에 컴퓨터 공학과를 만든 상태였는데 두 사람의 뜻이 맞았던 것이다. 동시에 아이번 서덜랜드와 데이비드 에반스는 ‘에반스 & 서덜랜드’라는 이름의 회사를 창업했다. 서덜랜드는 학교와 회사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유타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는 컴퓨터 그래픽스 분야에서 우뚝 섰고, ‘에반스 & 서덜랜드’ 사는 그래픽 디스플레이 하드웨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학교와 회사에서 모두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던 서덜랜드는 1974년에 또다시 돌연 유타 대학교와 ‘에반스 & 서덜랜드’에서 모두 발을 빼고 미국 서부로 이사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에반스 & 서덜랜드 사는 너무 규모가 커져서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확실히 나는 작은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는데 솔트레이크 시는 몰몬교도가 아닌 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3​

서덜랜드는 가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을 이용해서 영화를 제작하는 회사, 일렉트릭 픽쳐Electric Picture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곧 실패했다. 회사를 정리한 후 그는 근처에 있는 RAND 연구소를 방문하여 컴퓨터 부서의 부장을 찾아갔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직했어요.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신을 채용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급여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그가 아주 많은 액수를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4일하고 반나절만 일할 겁니다.”​3​

RAND 연구소에서 그는 반도체 집적회로와 관련된 연구에 참여하는 한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에 지원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컴퓨터 과학과를 신설하려 준비 중이었고 아이번 서덜랜드는 초대 학과장을 맡게 된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는 반도체 집적회로 설계를 연구하던 카버 미드Carver Mead 교수가 있었다. 사실 ARPA 시절부터 두 사람은 알고 지낸 사이였다. 서덜랜드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반도체 설계 연구의 중심지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당시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연구 관리자로 일하던 형, 버트 서덜랜드를 통해서 카버 미드와 린 콘웨이Lynn Conway가 만나도록 주선해 주었다. 카버 미드는 이를 계기로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소와 자문 계약을 맺게 되었고 린 콘웨이와 함께 <VLSI 시스템 소개>​6​라는 책을 발표했다.


1978년에 서덜랜드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먼저 그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서 로봇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가 만든 로봇은 1983년에 발표되었는데 여섯 개의 다리로 걸어 다녔고 그래서 트로얀 바퀴벌레Trojan Cockroach라는 이름으로 불렸다.​3​ 아울러 1980년에는 과거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의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밥 스프라울과 함께 컨설팅 회사를 시작했다. 이 회사는 후에 썬마이크로시스템즈에 의해 인수되어 썬 연구소Sun Laboratories가 되었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라클에 인수되면서 그는 썬 연구소를 떠났다.

한편 컨설팅 회사 시절에 그는 호주에 휴가를 가서 해변에 누워 있다가 FIFO​‡​를 비동기식으로 구현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휴가에서 돌아온 후 조수와 함께 이를 구현해 보았고 실제로 동작함을 확인했다. 그는 이 기술을 마이크로 파이프라인micropipelines이라는 제목으로 튜링상 수상 강연에서 발표했다.​1​

200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그는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는 포틀랜드 대학교에서 비동기식 연구 센터Asynchronous Research Center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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