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비는 서류를 챙기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짜증이 났던 것일까?’ 회의실을 나서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에 멀리 계단을 내려가는 존의 뒷모습이 보였다. 코비는 조용히 존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건물을 나와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잰걸음으로 존을 따라붙었다.
“존.” 그가 부르자 존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코비.”
“생각보다 걸음이 빠르네요. 하하.”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존. 오늘 회의는 어땠나요?”
“글쎄… 뭐, 지난번과 별 차이가 없지 않았나요?” 존의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 나왔다.
그들이 참석한 회의는, 컴퓨팅 자원 확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소위원회의 정기 회의였다. MIT는 컴퓨터가 부족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MIT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전자식 컴퓨터를 개발하기도 했지만 이는 군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기계였다. 일반 교수나 대학원생들이 전자식 컴퓨터를 접하기는 어려웠다. 워낙 고가의 기계였으므로 대학의 예산으로 구매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MIT는 IBM과 좋은 협상을 하게 되었다. IBM의 704 컴퓨터를 대여받아 학교에 설치하고 전체 사용 시간의 3분의 1은 MIT가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나머지 사용 시간 중 절반은 동부 지역의 다른 대학교들에 할당되었다.
MIT의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전자식 컴퓨터에 환호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24시간 중 8시간은 이들의 갈증을 채워주기에 부족했다.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추가로 확보해 달라는 요구가 증가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너무도 비싼 물건이었다. MIT의 예산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IBM에 도움을 요청해 보았지만 IBM은 더 이상의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대학 측은 떠밀리듯이 위원회를 만들었다. 컴퓨팅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도출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위원회는 다시 실무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전기공학과의 허브 티거Herb Teager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고 전기공학과의 존 매카시John McCarthy 교수와 컴퓨테이션 센터의 페르난도 코바토Fernando Corbato 연구원도 포함되었다.
소위원회는 즉흥적인 해결책보다는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대학 공동체 구성원들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분할 시스템으로 가는 것이 옳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는 존 매카시 교수의 지론이었다.
총론에서는 공감대가 생겼지만 각론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티거 교수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프로그래밍 언어, 전용 하드웨어 등을 개발하고 싶어 했고 필기체 인식 기능을 구현하려 했다.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무리라고 주위에서 조언했지만 그는 독불장군이었다.
“코비. 나는 이제 포기했어요. 이 위원회뿐만 아니라 MIT도 포기했습니다.”
존의 고백에 코비는 깜짝 놀랐다. MIT에 인공지능 연구소를 만들고 시분할 시스템을 제안한 장본인인 존 매카시 교수가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니.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같은 포닥postdoc은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사실 시분할 시스템은 이제 당신의 몫 아닌가요? 나는 인공지능에만 전념하기로 학과장에게 약속했으므로 코비 당신이 잘해 나가리라고 믿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코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저에게 간단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티거 교수님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구요. 시분할 시스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정도의 단순한 시스템을 만들어 보는 거죠. 우리가 시분할 시스템을 주장했던 이유가, 하나의 컴퓨터를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잖습니까? 그래서 제 생각은, 아주 단순하게 여러 대의 터미널들을 연결하고 각자 그 앞에 앉아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정도만 구현해 보자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존은 걸음을 멈추고 코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시분할 시스템이 어느 정도나 성능을 낼지는 솔직히 우리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적극적으로 찬성입니다.”
코비는 존의 지지에 의욕이 솟구쳤다. 위원회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이 꼭 해봐야겠다고 그는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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