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과학자로서의 삶
페르난도 코바토(Fernando Jose Corbato)는 1926년 7월 1일에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코비Corb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가 5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UCLA의 스페인 문학 교수로 채용되면서 가족이 모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진주만 공습이 발생했는데 그 영향으로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2부제 수업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더 많은 수업을 들었고 2년 만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UCLA에 입학한 그는 7개월 후에 에디Eddy 프로그램에 등록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에디 프로그램은 군대에 필요한 기술자technician를 훈련하는 과정으로서 이 과정을 수료하게 되면 기술자로 군 복무를 할 수 있었다.
1946년 초에 제대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복무자를 위한 특별법(G.I. Bill)의 혜택을 받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다시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1950년에 학부를 졸업한 후 MIT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코바토는 물리학을 전공했으므로 컴퓨터를 직접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던 필립 모스Philip Morse 교수는 훨윈드 컴퓨터를 사용하는 일자리를 그에게 제공했고 덕분에 그는 훨윈드 컴퓨터에서 프로그래밍을 해 볼 수 있었다. 그가 작성한 프로그램은 분자 궤도를 계산했다. 그가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에 모스 교수는 MIT에 컴퓨테이션 센터Computation Center를 만들었고 그에게 센터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컴퓨테이션 센터에서 박사후과정을 시작했다.1
모스 교수는 컴퓨테이션 센터에 필요한 컴퓨터를 확보하기 위해 IBM에 접근했다. IBM은 당시 가장 최신 기종이었던 704 모델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단, 컴퓨터 사용 시간을 셋으로 나누어서 각각 IBM, MIT, 기타 대학들이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컴퓨터 수요가 증가하자 IBM 704 컴퓨터에 대한 불만도 증가했다. 704 컴퓨터는 일괄 처리batch processing 방식으로 동작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수행 결과를 곧바로 알 수 없었다. 작은 타이핑 실수조차도 그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59년에 당시 MIT 교수였던 존 매카시는 시분할 시스템을 제안했다. 이를 계기로 MIT 내부에서 시분할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를 공식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위원회는 티거 위원장의 주도하에 의욕적인 계획을 세웠다.2 하지만 코바토는 그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시분할 시스템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수준의 작은 시스템을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1961년 여름에 코바토는 두 명의 프로그래머와 함께 소규모 시분할 시스템을 프로그래밍하기 시작했고 11월에 4대의 터미널을 연결한 시연에 성공했다. 이것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도의 시스템이었다. 타이머 인터럽트와 메모리 경계 레지스터bound register가 포함된 IBM 7090 컴퓨터가 나온 후에야 완전하게 동작하는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이 시분할 시스템은 CTSS라고 불렸다.
CTSS가 개발되고 있는 와중에 시분할 시스템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ARPA의 IPTO 실장이던 릭라이더는 그가 꿈꾸던 “인간과 컴퓨터의 공생”에 시분할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하리라 믿었다. 그는 MIT와 손을 잡았고 그렇게 해서 MAC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지원금이 MIT로 흘러 들어갔고 MAC 프로젝트의 우산 아래 전자과, 전기과, 수학과, 컴퓨테이션 센터의 컴퓨터 전문가들이 모였다.§
CTSS의 성공은 새로운 목표를 잉태했다. CTSS는 시분할 시스템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연습 경기였으므로 진짜 실전 경기를 해야 했다. 제대로 된 하드웨어 위에서 상용화가 가능한 수준의 시분할 시스템을 만들 차례였다. 새로운 시스템의 이름은 멀틱스Multics라고 불렸다.
코바토는 MAC 프로젝트에서 컴퓨터 시스템 연구 그룹을 맡았다. 아울러 1970년대 중반까지 멀틱스 개발을 이끌었다. CTSS 개발을 인정받아 1962년에 MIT 전기공학과 조교수로 임용된 그는 1965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1996년에 은퇴한 그는 2019년 7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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